길은 많다.
두 갈래, 세 갈래, 그리고 셀 수 없는 수많은 길.
모두 짙은 안개 속이고 힘든 길이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다 그렇듯 힘드니까 인생인거고 묘하게도 살다보면 다 살아진다.
못견디게 괴로웠던 일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일도 어느 날엔 허허 웃으며 마주할 수 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고 얼마나 열심히 밀어 붙이느냐에 달렸다. 그럴때 선택은 앞날에 대한 기대치이고 즐거움이다.
문승실 엠비가구 대표.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이윤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실천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교인으로 어디서든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되었지만 고비마다 꺾여 이 길, 저 길을 걸었다.
원치 않은 길,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었지만 그 어떤 고난도 그를 꺾지는 못했다.
실의에 빠져 힘든 날을 보냈고 더러는 포기한 적도 있었으나 그 길 끝에서 그는 오뚜기 처럼 일어나 역경의 세월을 자신의 길로 만들었다.
그는 살면서 제대로 된 선택지를 받은 적이 없다.
몇 번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들이닥친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찌감치 꿈의 길에 들어섰다. 태권도의 꿈이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재능을 타고 났고 몸도 뒷받침이 되었다.
태권도로 대학에 스카우트 됐고 군 시절 이미 사령관기 챔피언이 되었다. 제대 후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혔다. 태권도가 올림픽 시범종목을 거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을 때 여서 그야말로 전도양양이었다.
이제 한 단계만 더 오르면 국가대표. 그런데 몸이 무너졌다.
1차 선발전을 통과하고 맞이한 2차 선발전. 모두 라이트급 최강자인 문승실이 대표로 선발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었고 그 역시 태극마크를 당연시 했다.
하지만 동료와의 연습과정에서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상황 자체가 대단한 게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부상은 의외로 심각했다. 십자인대가 나가거나 무릎이 고장 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으로 살 수는 있지만 운동 선수를 계속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청천벽력이었다.
동료와 장난삼아 치고 받고 했던 한순간의 실수가 그의 평생 꿈을 종치게 한 것이었다. 치열한 재활 과정을 거쳐 정상인은 되었지만 발차기 한 방에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선수와는 작별을 해야 했다.
멀어진 태극마크
무엇을 할까. 한시가 아까운 젊은 시절을 방황 속에서 보냈다. 오직 태극마크만 생각했고 목표를 바로 눈 앞에 두었기에 다른 길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전혀 엉뚱한 일은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잘 알고 잘 하는태권도를 다시 선택했다. 선수는 당연히 아니었다. 아이들과 씨름하는 체육관장이었다.
비룡태권도장. 서울 송파구쪽에 태권도장을 열었다. 그의 도장에선 태권도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사람됨을 먼저 가르쳤다. 태권도는 인성과 예의범절을 더 중요시하는 무도. 그건 늘 성실과 신뢰, 의리를 최우선으로 두는 문승실의 인생관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와 함께 공부도 할 수 있도록 했다.
뭔가 조금은 다르고 비범한 체육관. 비룡은 학부모들의 호평 속에 승승장구했다. 개관 6개월여 만에 사범을 5~6명을 두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키우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대리만족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겨울 날, 문승실은 또 다른 시련에 부딪쳤다.
그날 사범 한명이 나오지 않았다. 하교 길의 아이들 버스 운전대를 대신 잡았다. 한 아이를 내려주고 급히 출발했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백미러를 보니 아이의 할머니가 손짓 발짓을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이의 옷이 문에 낀 것을 못보고 수십미터를 운행했다.
급하게 세웠지만 아이의 상태는 매우 심했다. 목숨이 달린 중한 상황이었으나 겨울 빙판길에 미끄러진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가 당한 불운보다 나 때문에 당하게 된 아이의 불운이 가슴을 쳤다. 거의 매일같이 아이를 걱정하고 들여다 보며 신경을 쓴 덕분인지 아이는 8개월여 병원신세를 진 끝에 퇴원했다. 아이도, 아이의 부모도 좋아졌지만 문승실은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했다.
“아이의 부모님과는 지금까지도 왕래하면서 안부를 묻곤 합니다. 부모님이 정말 고맙죠. 저를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텐데도 나중엔 위로까지 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건강하게 성장, 우리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책감 등 충격 때문에 당시 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체육관을 접고도 2년여. 그는 여전히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장면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부상으로 몸이 망가진 위에 정신적인 충격이 가해져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였다.
그래도 살면 살아지는 게 인생.
태권도장 시절 학부모 한 명이 그를 ‘운명의 가구’쪽으로 그를 인도했다. 성실한데다 사람 좋고 싹싹한 문승실을 어떻게든 돕고 싶었던 그는 문승실의 처지를 이해하며 자신이 운영하는 가구점에서 일할 것을 권했다. 문승실의 사람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세일즈 쪽 재능을 캐치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트라우마는 완치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세월을 그렇게 보낼 수 없었던 문승실 이었다. 뜻밖의 일이지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태권도는 어차피 떠난 인연 아닌가.
가구점에서 잔 일을 하며 세일즈의 기법을 하나 둘 익혀갔다. 가구 판매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믿음을 얻어야 뭐든 팔 수 있었다. 물론 가구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그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한 손님이 이사를 하면서 가구를 싹 바꿀 요량으로 매장을 찾았다. 마침 매장 매니저가 나오지 않은 날이었다. 어찌 보면 첫 손님이었다.
문승실은 손님을 예의 바르게 응대했다. 지나치게 권하지도 않았지만 물어 보는 것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했다. 어깨 넘어 배운 지식만은 아니었다. 새 길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책이나 혼자만의 연구를 통해 익힌 것을 유감 없이 피력했다. 손님은 설명을 들으며 장을 사고 소파를 사는 등 순식간에 수천만원의 가구를 구입했다.
가구 세일즈의 귀재
한달 이상의 매출을 불과 몇 시간 만에 올렸다. 가구점 사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문승실에게 가구 세일즈를 권한 것도 그의 자질을 어느 정도 내다 보아서였다. 사장은 ‘운동선수라도 국가 대표 급은 역시 다르구나’하는 것을 느꼈고 이내 문승실을 전문 판매 매니저로 앉혔다.
문승실은 가구를 배달하면서 또 한 번 자질을 드러냈다. 그 손님의 집이 비교적 큰 집이어서 보통 사이즈가 조금씩 모자랐다. 코너 자리가 비어 전체적으로 모양이 나지 않았다. 그는 코너장을 추천했고 이미 문승실의 전문적인 시각을 믿고 있었던 집 주인은 문승실이 추천 하는 대로 구색을 맞추었다. 현장에서 또 수백만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문승실은 그때 이미 ‘인테리어 컨설턴트’역을 개발했다.
“특별히 비결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첫째는 응대법 이었고 둘째는 전문지식이었죠. 태권도를 시작하면 처음 배우는 것이 예의범절입니다. 어떤 경우든 깎듯하고 반듯해야 합니다. 신경 쓰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모든 손님이 세일즈맨의 태도에 대해 매우 민감합니다. 버릇없이 굴면 마음속에서 미리 차단하고 그러면 판매는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손님이 원하는 정보도 꼭 필요합니다. 가구라고해서 다 똑같지도 않고 품질에서도 제법 차이가 납니다. 팔기위해 무조건 좋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 손님도 보는 눈이 있는데 말이죠. 당시 판매원 중엔 건성으로 손님을 대하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서 판단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나중엔 무조건 믿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이번이 아니라도 다음엔 판매가 이루어 지는 것이고요.”
소문이 무서웠다. 태권도 관장이 알고보니 ‘타고난 영업 맨’이었다는 말이 퍼져 나갔다. 소문은 갈수록 커져 나중엔 문승실이 ‘세일즈의 귀재’처럼 되어 있었다.
어쨌든 문승실의 명성은 높아져 갔고 소문은 대리점을 넘어 본사에 까지 이르렀다.
본사는 문승실을 본사 직영매점에 배치하는 한편 세일즈에 대한 강의를 맡겼다. 가구 세일즈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그의 자질과 노력을 높이 평가한 조치였다. 덕분에 그의 가구에 대한 전문 지식과 세일즈 기법이 더욱 세련되어 갔다.
모두 스스로 길을 파고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엔틱가구에 대한 열정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만날 인연이지만 어느 날 십장생 옥돌장을 만났다. 옥돌의 화려함도 매력적이었지만 장 전체를 뒤덮은 구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구가 아니라 예술이었다. 옥돌. 십장생, 장롱에 대해 알아보았다. 책으로는 미진했다. 옥돌장 사장에게 찾아가 배움을 부탁했다. 장인들 틈에서 제작 과정을 보면서 십장생 옥돌장에 대해서 마스터했다.
열심히 공부한 대가는 있었다. 작은 아파트 한 채 값과 비슷한 십장생 옥돌장을 10세트나 팔았다.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가구 판매 챔피언이 된 전 태권도 챔피언.
그렇게 한 2년쯤 지나자 그는 업계의 기린아가 되었고 보다 큰 가구회사에서 그를 찾았다. 대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사람에 대한 배려였다.
그 때가 전문적으로 가구를 팔고 만드는 회사를 차리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들 때였다.
가구업은 호황이었다. 국내 제조품도 나쁘지 않았지만 수입품이 득세하고 있었다. 원가의 10배 이상을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판매만으로도 먹고 살만했지만 정말 좋은 가구를 좋은 가격으로 좋은 소비자에게 연결해 주기 위해선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엔틱가구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 길을 더듬었다. 또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쯤 ‘나의 매장’을 가질 때가 되었다. 바로 실행에 옮겼다.
1990년대 말, 신도시 일산에 자신의 매장 문을 열었다. 처음엔 미국 브랜드를 흉내 내어 가게를 오픈하고 주로 미국산 수입품을 팔았다. 새로 입주하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매장에 앉아서 가구 한 개, 한 개를 파는 대신 고객 집을 직접 방문, 맞춤 세일을 했다. 집 크기, 내부 구조를 감안했다. 인테리어까지 겸한 판매 정책이었다.
고객들은 늘 만족했다. 그러나 그는 불만족스러웠다. 늘 어딘가 한군데가 찜찜했다. 미국 브랜드를 그대로 차용한 것도 그렇고 고객의 요구를 다 수용할 수 없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 3년쯤 흘렀을까.
마침내 엠비가구가 출발했다.
첫 이름은 콜렉션이었지만 현재 엠비의 시발점이었다.
엠비도 사실 미국의 유명 브랜드였다.
1990년대 중반, 세계의 가구시장을 알아보기 위해 첫 비즈니스 나들이를 했다. 첫 도착지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의 하이포인트 가구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그의 안목을 깨우친 것이 미국 톱클래스인 MB콜렉션이었다. 전 세계로 팔려나가는 MB의 가구들을 보면서 목표를 다시 세운 그는 무조건 사장 면담을 요청했다.
사전 약속 없는 한국 사업자의 갑작스러운 미팅 요구를 그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안되면 될 때 까지 되게 하라’는 스포츠 정신이 있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려 결국 라이선스를 따냈다.
MB콜렉션 한국 단독 지사. 묘하게도 엠비는 문승실의 성씨와도 맞아 더욱 자신의 것 같았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MB라는 이름 때문에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축복을 만들어낸다’는 스페인어 Manufacturar Bendicion 의 첫 글자 모임이기도 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다.
MB콜렉션 수출입으로 무척 잘 나갔다. 미국 제품을 들여와 무섭게 팔았고 미국의 MB콜렉션을 통해 엠비의 수제 엔틱 고급 가구가 미국, 유럽 등지로 퍼져 나갔다. 한때는 매달 6만달러 이상의 한국 물건을 MB콜렉션에 넘기기도 했다. 덕분에 IMF 타격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늘 양지 일수는 없는 법. 2000년 초 위기가 닥쳤다. 중국의 값싼 가구가 넘쳐났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국내 소비자들도 중국제품을 찾았고 해외 바이어들도 중국 물건들을 선호했다. 가격면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무너질 그가 아니었다. 새로운 판로를 개척했다. 은행과 공공기관 등을 직접 상대하기로 한 것이었다. 디자인, 제품에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시작만 되면 문제없을 것으로 여겼다.
과연 그대로였지만 첫 제품을 납품할 때 까지 2년여가 걸렸다. 이미 다른 업체들이 시작한 터여서 좁은 길을 뚫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꽤나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경쟁사가 늘어나면서 그야말로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품질과 신뢰로 하나 하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일단 납품이 되고 품질에 대한 믿음이 쌓이자 그 다음 길도 잘 열렸습니다. 매번 경쟁을 해야 했지만 사용한 업체에서 소문을 내면서 도와주는 덕분에 계약을 하자는 곳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일반 시중은행의 창구와 대기실, 한국은행, 국민은행 등의 임원실 고급가구, 대중을 상대로 하는 맥도날드 등의 매장 내부가 엠비의 시스템 가구들로 가득 채워졌다. 몇몇 은행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엠비가구를 찾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고 비록 입찰가가 저조해 손해를 보더라도 제품의 질은 유지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엠비는 고급사무용 가구로 일가를 이루었다. 부침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이후로도 친환경 가구, 엔틱 가구를 개발, 발전시켰다. 판매상으론 히트를 치지 못했지만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편백나무 가구 등은 업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젊은이의 꿈'을 밀어주고 싶다
어쩌다 시작한 가구가 어느 새 30년이 되었다.
그 사이 엠비가구는 높낮이 조절용 사무용 책상, 가구용 발통 등의 특허권과 다수의 실용신안, 단체표준인증, 디자인 등록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가구산업의 전반적인 하향추세로 사업이 한창 때 같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지금처럼만 해도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문승실 대표는 이제 조금 다른 길을 바라보고 있다. 정확하게 ‘이 길’이라고는 내세울 수는 없고 결심을 굳힌 것도 아니지만 사회에 보은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하고 있다.
문승실 대표는 김포, 일산 등에 공장을 차렸고 매장을 운영했다. 그곳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서 오래전부터 ‘나누는 기쁨’을 맛보았다. 해마다 김포 등지에 쌀을 기부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연세대병원이나 중앙대 등에 발전기금을 내놓았다. 대단히 부자여서도 아니고 이름을 알리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안했다. 그는 문화 나눔에도 빠지지 않았다. 여럿이 모여서 했지만 오케스트라를 지원하기도 했다.
김포의 어느 공무원은 어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기부하는 그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무뚝뚝한 나눔 실천가’.
문승실 대표는 그런 소리에 ‘천부당 만부당’이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그건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다.
맨손, 맨몸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 더 욕심 낼 일도 없다는 생각이다.
인생 2막일지 3막일지 잘 모르겠으나 젊은 시절부터 간절히 원했던 선택지였다.
많지는 않더라도 소중한 기금을 마련해서 ‘젊은이의 꿈’을 밀어주고 싶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