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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그곳엔 멋과 맛이 있다-다동, 무교동

이신재 기자 | 2022-05-16 10:32
다동 무교동 음식문화 거리 초입이미지 확대보기
다동 무교동 음식문화 거리 초입
그들은 이제 역사가 되고 풍경이 되었다.

반세기 긴 세월, 온갖 풍상도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더러는 흔들리면서, 더러는 온 몸으로 뚫고 헤쳐나오며 제 자리를 지켰다.

50년 반세기. 긴 시간이지만 그들은 기실 그 이상의 세월을 그곳에 버티고 서서 흘러가는 세월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했다.

‘다동길’ 팻말을 보고 들어서면 저만치 아담한 2층 건물이 보인다. 주위도 이곳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게 여유롭다. 뭔가 싶지만 파출소다. 오래 전 서울에서 가장 떠들썩한 밤을 지킨 태평로 파출소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 태평로 파출소는 밤이 없었다. 주변 술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취객들이 밤 새 모여 들었다.

파출소 인근 3천여평의 넓지 않은 공간은 극장식 식당, 스타급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대형 비어 홀의 원조 지역이다. 참새를 구워 파는 작은 선술집, 밤을 밝히는 인생 포장마차 등 수십개의 술집이 있었다.

캬바레, 나이트 크럽, 빠 등의 휘황찬란한 네오사인 간판은 보는 것만으르도 술꾼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스타다스트, 코파카바나와 음악다방이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 가리지 않고 빨아 들였다.

‘주다야싸’도 10여곳은 족히 되었다. 주간에는 차를 파는 다방이고 야간에는 술을 파는 싸롱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속칭이 아니다. 간판까지 단 공식이름이다.

밤의 술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낮에 직장인들에게 커피를 싸게 팔았다. 상당한 미모의 젊은 아가씨들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밤 보다 더 인기 있었다. 잘만하면 커피값의 수십, 수백배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모든 업소가 ‘대표선수’를 근무시켜 치열하게 밤 손님 유치전쟁을 벌였다.

지금 그곳엔 파출소보다 더 나이 많은 경찰관은 한 명도 없다. 환갑을 넘겼으니 당연하다.

태평로 파출소를 둘러 싼 반경 100m가 ‘역사와 풍경’의 골목이다. 대부분 오른 쪽에 50년, 60년 아니 80년 된 음식 가게들이 있다.

파출소를 지나 첫 골목 초입에 1932년 생인 추어탕의 ‘용금옥’이 있고 오른쪽 옆 골목에 ‘북어국’ 집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이 동네 왕고참들을 만날 수 있다.

내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등이 사시사철 줄을 서는 북어국집 옆에 옆에 ‘로스구이 집 낙동강’ 이 있고 코너를 돌아나서면 육개장과 곱창의 ‘부민옥’이다.

부민옥을 지나 넓어졌다 다시 좁아지는 골목에 복지리와 복 불고기의 철철복집이 있고 마주 보이는 곳에 어복쟁반과 냉면의 남포면옥, 그리고 오른쪽 옆에 숙성 등심을 동그랗게 잘라서 파는 ‘낙동강’이 있다.

남포면옥과 낙동강 사이에 순두부로 유명한 우리집이 있었다. 50년 이상 그 자리를 지켰으나 코로나와 주인의 건강 때문에 최근 문을 닫았다.

철철복집과 남포면옥, 낙동강의 앞 공터는 흡연 해방구다. 나무 10여그루가 있는 도심 속 작은 공원인데 현대식 재떨이가 10여 개 설치 되어있다.

금연구역이라고 쓴 오래 된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비공식이지만 공식적으로 허용된 오픈형 야외 흡연장이다.

점심 나절이면 50여명이 ‘작은 숲’ 속에서 호연지기를 키우며 시원하게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담배 피우는 맛이 절로 나는 그린 공원이다. 어쩌다 이 곳을 발견한 흡연쟁이들은 바쁜 걸음을 멈추고 선 자리에서 두 개피를 피우기도 한다. 연기를 내뿜을 때 그들의 얼굴엔 한 순간이지만 행복이 그득 담겨있다.

남포면옥을 오른쪽에 두고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 몇 걸음 움직이면 왼쪽에 쪽갈비로 유명한 ‘오는 정’이 있고 두어발짝 간 후 오른 편으로 돌면 싸고 맛있는 제육볶음의 ‘대원’이다.

대원집은 막다른 골목같은 곳. 하지만 아니다. 길 아닌 듯한 길이 이어지고 30m쯤 가면 왼쪽에 도다리 쑥국과 멍게 비빔밥의 ‘충무횟집’이 불쑥 튀어나온다.

현대사와 맛의 산증인인 이들은 오래전부터 친목삼아 만나다가 장학회를 만들었다. ‘태평로 장학회’로 주위 근로자의 자녀들을 공부를 지원한다. 십수년째로 태평로 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이 졸업 후 이곳으로 돌아와 식당업에 뛰어 들기도 했다.

용금옥은 추어탕 전문집이다. 어떤 식으로 먹느냐만 결정하면 된다. 미꾸라지를 갈아서 먹는 경상도식과 통째로 듬성듬성한 전라도 식이다. 탕에 사리를 넣어 먼저 먹고 다음에 밥을 먹는 식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문을 열었다. 서울 출신 북쪽 사람들도 기억하는 곳이고 수많은 문필가들의 비싸지 않은 값으로 한 끼를 넘겼던 추억의 공간이다.

낙동강은 실내를 바꾸었다. 구석 진 골목에 있을 땐 앉아서 먹는 방이었으나 지금은 식탁이다. 된장찌개가 로스구이 못지않게 맛 있다.

부민옥과 남포면옥은 언론인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부민옥의 육개장은 지금도 고기가 많지만 그 옛날엔 그야말로 푸짐했다. 국 속에 들어있는 소고기로 소주 한 병은 너끈히 해치울 수 있다.

젊은 기자들이 그곳을 찾는 이유는 또 한가지가 있었다. 운 좋게 선배를 만나면 그냥 나와도 되기 때문이었다.

1970년, 80년대 초반만 해도 서울에 본사를 둔 종합지가 10곳이 되지 않았다. 신문사의 기자들도 100여명 내외여서 모두 알고 지냈다. 타사의 선배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일행 중 한 명은 반드시 아는 얼굴이었다. 선배들이 무조건 밥값, 술값을 내던 시절이었다.

남포면옥의 어복쟁반은 가격이 좀 나간다. 풍미는 있지만 쉽게 시킬 수 없다.냉면과 수육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데 냉면 맛에 대해선 호불호가 있다.

대원식당은 구순의 할머니가 지금도 점심땐 심심찮게 얼굴을 비친다. 아직도 정정해서 누구도 그 나이로 보지 않는다. 알맞게 양념이 된 제육볶음을 먹고 나서 밥을 비비면 금상첨화다.

된장찌개를 곁들여 준다. 웬만한 된장찌개 전문집보다 맛이 좋다.

충무집은 을지로 쪽 길가에서 이사했다. 사철 충무에서 직송한 회를 만날 수 있다. 식당 앞에 개업 때 받은 축하 화환 사진이 있는데 사진속의 코흘리게가 지금의 사장 쯤 된다.

회는 신선하고 매운탕은 시원하, 칼칼하고 멍게 비빔밥은 식욕을 되살려주는 특품이다.

‘오는 정’은 두명 이상 가야 한다. 그래야 생선구이와 돼지불고기를 1인분씩 시켜서 점심 한때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할머니 사장님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바로 옆에 쪽갈비 집이 두어군데 더 있다. 할머니는 비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원조의 자존심을 걸고 지금도 직접 음식 간을 본다. 저녁에 먹는 쪽갈비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술을 부른다.

오랜 세월 그곳에 있는 무교동. 정작 있어야 할 것 한가지가 없다. 바로 무교동 이름을 내세운 ‘무교동 낙지’ 집들이다. 한땐 10여 곳이 골목을 이루었다. 낙지를 비빈 뻘건 양념 국물만으로도 막걸리 한 주전자는 족히 넘겼다.

한 접시 시켜놓고 술 먹고 밥 먹고 할 때의 그 시절 무교동 낙지가 지금보다 훨씬 맛 있었다. 길 거너편 종로구쪽의 서린동, 청진동 쪽으로 모두 넘어갔다.

역사이고 풍경인 다동, 무교동 음식문화거리.

봄이 되면, 여름이 오면, 가을이 갈때쯤이면 더욱 좋다. 사람 사는 향내가 물씬 풍긴다.

[이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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