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인그룹 김영철회장의 사무실에는 ‘100년 달력’이 있다. 1995년부터 2094년까지 표기된 단 하나 밖에 없는 달력이다. 100년 기업을 향한 그의 의지가 담겨있고 계획도 서 있다.
‘1천명의 사내외 강사와 3만명의 직원을 선한 리더로 육성하고 1천개의 지사를 운영해 매출 1조원의 글로벌 그룹으로 우뚝 선다.’
뭔 소린가 싶지만 이제 그의 이 계획을 코웃음치며 넘기는 사람은 없다. 그의 4반세기 잰 걸음을 옆에서 지켜 보았고 그래서 충분, 그 이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1995년, 그가 비새는 작은 사무실에서 100년 가는 그룹을 키우기로 마음 먹은 해다.
시작은 참 서글펐다. 서울 중구 퇴계로 쪽 오래된 3층 건물 2층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당번이 필요했다. 비 새는 곳에 물통을 가져다 놓고 수시로 비워야 했다.
부랴부랴 시작한 탓이었다. 잘 다니던 회사가 업종을 바꾸는 바람에 엉겁결에 창업했다. 전집류 판매 대행 회사 류였다.
그의 영업 노하우를 배우려는 십수명의 영업직원이 뜻을 같이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활기 찼다. 뭔가를 해보려는 의욕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오래 하지는 않았다.
책을 팔기 보다는 책 안의 내용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냥 덜렁 파는 것이 아니라 잘 전달되도록 포장해서 넘기자고 마음 먹었다.
개척을 해야 했지만 어쨌든 ‘돈’이 될 것 같았다.
그게 1995년이었다. 전집류 판매 대행 회사가 교육 전문회사 ‘국민에디코’로 거듭 났다. 사무실도 조금 넓혀 이사했다. 동하계 수련회를 통해 ‘함께 도전하고 함께 이루자’고 다짐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이라고들 했다. 교육관련 전문회사는 이미 차고 넘쳤다.
대교같은 대기업도 있었고 중소기업은 부지기수였다. 모두 미래의 블루칩이라고 했으나 경쟁자가 너무 많아 형편없는 레드 칩이 되고 말았다.
과연 성공 할 수 있을까.
연봉 2천만원의 출판계 최고 세일즈맨 김영철은 확신이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경험을 통해 그런 것들을 그냥 알고 있었다.
그는 촉망받는 유도 선수였다. 고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우승 하며 국가대표를 꿈 꾸었다. 덕분에 전액 장학금을 받는 체육 특기생으로 경기대에 입학했다.
태극마크가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너무 운동을 열심히 한 것이 화근이었다. 무릎 연골이 너덜너덜해졌다. 운동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어릴적부터 해 온 유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상실과 시름의 세월이었다. 방황을 했지만 그것도 처지를 생각하면 사치였다.
대학을 그만두고 양구 시골로 내려갔다가 이내 상경했다. 뭐라도 하려면 그래도 서울이어야 했다.
국민서관에 입사했다. 창고 직원 비슷한 것 이었다. 힘이 있으니 무거운 책 옮기기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내 보직을 변경했다. 영업을 해야 돈을 벌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판 영업은 어려웠다. 사내에서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운동만 했던 사람이 책 영업을 어찌 알겠느냐는 반응들이었다.
그건 그래도 약과였다. 일선 판매는 더욱 힘들었다. 잘 사지도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무시하기 까지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침 저녁으로 그만 둘 생각을 했으나 중도 포기가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힘들 때 마다 운동할 때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조금씩 그의 성실성이 먹히기 시작했다. 책을 팔기위해 터득한 지식도 점점 늘어갔다.
포기를 모르는 세일즈 맨 김영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업 1등의 ‘선수’가 되었다. 어느 새 최고액 연봉자가 되었다. 성공이다 했으나 회사가 업종을 바꾸었다.
‘이제 아는 게 출판영업 뿐’ 이라 회사를 차렸다. 이곳 저곳의 출판사로부터 전집류를 받아 파는 전문 영업회사였다. 나름 나쁘지 않았지만 이내 접었다.
발전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건 아닌 듯 했다.
한 번 더 고민했다. 책이 아니라 책 안의 내용을 팔기로 했다. 일반 지식은 아니었다. 위인전 등 전집류의 독자는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그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미 많은 업체들이 진출 한 터였다.
아이디어를 한 가지 더 붙였다. 운동하면서 익힌 ‘코칭’이었다.
운동이나 공부나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노력하면 는다. 하지만 혼자선 한계가 있다.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코치를 해야 정체기를 벗어 날 수 있다. 무조건 공부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과 요령을 가르쳐야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
방문학습은 같았지만 가르치는 방법이 달랐다. 금방 입소문이 났다. ‘국민에디코’의 방문 교사는 다르다. 실력 향상이 상당히 빠르다.
바늘 구멍만했던 자리가 점점 커졌다. 구멍을 넓히기 위해 강사들을 집중 교육했다. 잘 배워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김영철회장은 운동을 하느라 학창 시절 책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출판업계에 뛰어들면서 죽으라고 책을 읽었다. 책 읽는 목적은 두가지였다.
첫 번째는 판매를 위해서였다. 내용을 알고 감동을 받아야 독자를 설득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모자라는 교양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공부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사업을 하면서 그는 괜찮다는 조찬 강연을 빠지지 않고 다녔다. 마치 중독된 사람처럼 매일 빠지지 않고 찾아 다니며 공부하고 익혔다.
처음에 그저 잡다한 지식이었으나 어느 날 그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고 모이면서 전문화되었다.
직원들에게 교육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은 직원은 물론 결과적으로 회사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교육은 사람을 전문화하고 유용화하고 무기화하는 가장 값싸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성공자는 남다르다’는 그의 철학도 교육을 통해 깔끔하게 전달 되었다.
국민에디코는 빠르게 성정했다. 10억원 거쳐 97년 매출액 40억원을 올렸다. 3년만이었다. 직원도 230여명을 늘어났다.
초중등 교육사업 홈스쿨을 설립, 교육의 내용과 학습 코칭법을 업그레이드 한 덕분이었다.
김영철은 그즈음 명함을 다시 만들었다.
자신의 10년 꿈과 목표를 새겨 넣고 담금질하고 싶어서였다.
‘매출액 1000억원 신사옥 준공’.
남이 그렇다는데 굳이 시비 걸 것은 없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코웃음 쳤다. 40억 회사가 10년 안에 1천억원을 한다고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저 그런 교육사업으론 물리적으로 힘들었다. 더러 응원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건성이었다.
그렇지만 2014년 1월 김영철은 그 명함을 버렸다. 시효가 지난 명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올림픽 홀을 가득 메운 3,600여 직원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 그는 신년사를 했다.
“ 우리 회사는 사회에 빛이 되는 기업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우선이고 일은 그 다음이고 목표는 그 다음 다음입니다. 그랬음에도 우리는 지난해 1천억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소중한 우리 직원들이 최선을 다한 덕분입니다.”
1995년 자본금 2억원으로 시작한 회사의 현주소였다. 김영철회장이 ‘100년 기업’을 마음속에 두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김영철의 100년 기업은 단순하지 않다. 100년 그 이상을 유지해야하는 건 맞지만 그보다는 직원 한명 한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한 사회적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내에 사회봉사실천팀, 사회공헌부서등을 두고 북카페 등을 운영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사옥은 그 이듬해 준공했다. 사옥은 동대문구 쪽 지하 2층, 지상 17층 규모다. 그의 사무실은 2층이다. 낮은 곳에서 모두를 보듬고 싶어서다.
그는 처음 사업 시작할 때 대표나 사장이 아닌 처장 명함을 들고 다녔다. 같은 맥락이었다.
그가 사장, 회장이 된 것은 한참 후였다. 직원들의 성화도 있었지만 회사 규모가 처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2000년 국민에디코를 (주) 에디코로 바꾸었다. 교육전문회사로 완전히 변신, ‘그대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라며 밀어붙였다.
2003년엔 교육부로부터 에디코 평생교육원 허가를 받았다. 유아에서 성인까지 폭을 넓혔다. 사이버스쿨에선 1-1 수업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며 피교육자의 집중력을 높였다. 학생들의 실력이 부쩍 늘면서 매출도 껑충 뛰었다.
2005년은 창립10주년의 해. 일반 사업분야인 고려진생과 해외무역사업부를 오픈했고 이듬 해 중국지사를 열었다.
2007년 매출액이 3백억원이나 되었다. 회사는 교육벤처기업으로 또 한번 업그레이드 되었다.
돈 보다는 일이 먼저고 일 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동화같은 기업’ 에디코를 만들어 나갔다. 직원은 어느 새 1,300여명이 되었다. 경기도 안성에 연수원을 지어 교육과 휴식을 병행 할 수 있도록 했다.
매출 1천억원 시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사명을 아예 ‘동화세상 에듀코’로 바꾸었다. 언제나 해피엔딩인 아름다운 동화. 김영철은 기업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이름을 그렇게 지으면서 동화기업에 대한 의지를 모두에게 알렸다.
에듀코는 모든 분야에 코칭 개념과 실무를 도입했다. 비즈니스코칭, 진로코칭, 취업역량코칭, 리더십코칭, 유학코칭 등이 그것으로 초ㆍ중ㆍ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상상코칭’까지 개척했다.
상상코칭은 ‘학습ㆍ진로ㆍ인성’ 에 대한 청소년 전문 프로그램. 단순한 지식 전달이 목표가 아니다.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코칭하는 것.
동화세상 에듀코를 앞세워 매출 1천억원의 첫 목표를 달성한 2년쯤 후 동화세상 에듀코는 바인 그룹으로 모습을 또 한 번 바꾸었다.
그들 모두 ‘위대한 여정’을 시작한다는 각오였다. 바인은 단지 포도 열매가 아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열매를 맺게하는 포도 나무와 줄기를 뜻한다. 주렁주렁 포도가 달린 그림을 상상해도 된다.
혁신과 도약을 통해 같은 방향,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한 바인은 창간 25주년인 2020년 그룹의 모양을 갖추었다.
동화세상 에듀쿄의 교육 사업은 빼놓을 수 없는 모태이고 그 위에 플랫폼 서비스, 자산운용, 여행, 호텔업 등을 얹었다.
10여개 회사로 이루어 진 그룹 형태로 일본의 빌딩과 호텔을 인수하기도 했다.
일본쪽은 아들 김광섭 상무가 맡았다. 김상무 역시 유도 선수 출신. 아버지가 못 다 이룬 태극마크의 꿈을 이루었다. 세계선수권 등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김광섭의 마지막 무대는 도하 아시안게임.
동메달에 머물렀으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무릎 연골 부상으로 경기를 할 수 없음에도 강행, 메달을 땄기 때문이었다.
그건 메달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의 정신적 모델로 그 많은 금메달을 제치고 주인공이 되었다.
꺾이지 않는 의지는 아버지 이상이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선 아직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김영철 회장은 곧 따라잡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코로나로 정상적인 영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몇가지는 철수했다. 일단은 실패지만 다음을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100년 그 이상의 기업을 꿈 꿉니다. 매출 1조원은 숫자적 목표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직원, 착한 기업으로 우리 사회에 꿈을 심어주고 우리 사회에 늘 봄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초창기 매출 목표에 너무 신경 쓴 것이 부끄럽다는 김회장이다. 언제나 사람이 우선인데 처음이고 모든 게 급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직원이 회사를 사랑하지 않고 회사가 직원을 위하지 않으면 꿈도 못이루겠지만 이룬다해도 의미가 없다는 그.
그래서 바인에는 정년이란게 따로 없고 모든 직원들이 열정적이어서 무슨 선포대회 등을 할 때 보면 마치 열광적인 종교 집단 같은 분위기다.
새로운 25년을 시작하는 바인 그룹. 백년기업 바인은 김영철회장만의 목표가 아니다. 바인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과 그 가족들이 함께 누려야 하는 목표이고 꿈이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