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에 맞이한 86서울아시안게임도 사실 힘겨웠다. 탁월한 테크닉과 경기운영능력으로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자유형74kg급 금메달을 땄지만 매게임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아시안게임도 그러한데 세계최고선수들의 경연장인 올림픽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비록 내나라 내 땅에서 열리지만 2년 후이니 욕심을 버리는 것이 옳았다.
한명우에게 올림픽은 한의 무대였다.
스물다섯 살 한창때 맞이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나서지도 못했다.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절, 미국이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규탄하며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약소국 한국은 미국의 방침대로 모스크바올림픽 참가를 포기했다. 스포츠제전은 정치논리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스물아홉 살의 84년 LA올림픽. 최절정기는 아니었지만 메달은 충분했다. 레슬링강자인 동구권의 대거 불참으로 난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꺼리는 선수는 미국의 스포츠영웅 슐츠 정도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치루던 사이여서 결승전에서 만나면 해볼 만 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슐츠가의 형인 데이브 슐츠를 같은 조 2차전에서 만났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와의 경기중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중도 탈락, 일찌감치 귀국했다.
한명우의 노모가 충청도 어느 절에서 아들의 성공을 빌고 있던 날 그는 복싱의 김광선과 함께 김포공항에 서 있었다.
슐츠형제는 나란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형 데이브 슐츠는 74kg급, 동생 마크 슐츠는 82kg급이었다.
서른한 살이었지만 한명우에게 아시안게임은 어렵지 않았다. 적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떨어져 벌어놓은 점수를 까먹곤 했다. 경기를 하면서도 그는 ‘이번 대회가 마지막이겠구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미리 계획했던 캐나다 이민 절차를 밟았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협회의 장창전선무가 길을 막고 나섰다. 한명우의 아시안게임 전 이민도 반대하며 금메달 길을 깔았던 그는 이건희 회장의 특별지시라며 선수촌에 들어가라고 했다. “회장님께서 힘들여 키운 자산을 왜 캐나다에게 뺏기느냐며 너를 트레이너코치로 기용하라고 하셨네”
“트레이닝 코치가 뭔데요. 안할랍니다. 캐나다쪽하고 이미 약속이 되어있거든요”
“감독이나 코치는 힘이 딸려서 선수들을 잡아줄 수 없잖아. 너 정도면 선수들과 드잡이 할 수 있으니까 너의 노하우를 선수들에게 직접 전수하라는 거지. 프로야구에는 플레잉코치라는게 있다는데 그런거 하고 비슷한거야. 어쨌든 이민은 안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회장님이 특별하게 지시한 것이고 꼭 필요한 역할이기도 해”
트레이닝코치.
일찍이 없던 역할이었다. 한명우는 그 지겨웠던 태릉선수촌에 다시 들어갔지만 이번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땀방울을 비 오듯 쏟아내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렇다면 슬슬 놀면서 해도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레이닝코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독과 코치들이 주로 경량급 출신인데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서 선수들과 함께 놀아줄 수 없었다. 그저 간단한 동작이나 말로 지도할 뿐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직접 한 수 가르칠 수 있는 건 한명우 뿐이었다. 특히 중량급선수들은 더했다. 이 선수 저 선수 잡아주다 보면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1년여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레슬링이 다시 보였다.
선수시절엔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힘을 키우고 기술을 배우고 경기력을 다지고 다시 그런 행동들을 정신없이 무한반복하고...
그런데 트레이닝코치 입장에서 보니 같은 행동인데도 사뭇 달랐다. ‘왜?’를 생각하게 되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하면 힘을 더 키울수 있을까, 어떤 기술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써야 효과적일까, 선수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가, 강점을 키울 것인가, 약점을 보완할 것인가 등.
체력을 나누어 쓰는 법, 테크닉을 유효하게 거는 법, 상대의 약점을 캐치하고 흐름을 뒤집는 법 등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레슬링의 숨겨진 뒷면까지 보고나니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체력이 밑바닥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한계가 있었지만 즐겁게 스파링하고 보람찬 마음으로 후배들과 씨름하다 보니 그 한계점이라는 것도 모호해졌다. 무엇보다 체력안배의 기술을 터득했다. 경기중에는 당연히 긴장하고 집중해야하지만 그 때라는 것이 있어서 적절하게 사용하면 80%의 힘으로 120%의 효과를 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올림픽의 해인 88년. 한명우는 대표팀 트레이닝코치직을 사임했다.
장창전전무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할 수 있겠어. 우리나이로 서른셋인데”
“도전을 해보고 싶습니다. 체력도 그런대로 괜찮고요. 경기력은 제가 생각해도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레슬링의 달인이 된 것 같애요”
“그래, 그럼 한 번 해봐. 국내 선발전도 통과하지 못해 망신당하지 말고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열심히 해봐”
해보라고 했지만 장전무는 전혀 느낌이 없었다. 그 나이에 그것도 동양인으론 가장 무겁다고 할 수 있는 82kg에서 메달을 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운명을 누구라서 속단할 수 있을것인가?
행운 1라운드-선발위원회
한명우는 82kg급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예전처럼 74kg에 나설 수도 있었지만 무리하게 감량했다가는 정작 경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고 조금씩 나잇살이 들었고 동서양의 강자가 다 몰려있는 74kg급이 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내 선발전도 82kg급이 유리했다.
82kg급엔 사실 선수가 없었다. 5년 후배인 오효철, 10여년 후배인 이동우가 선발전에 나설 수 있는 정도였다. 트레이닝코치를 하면서 맞잡이를 해본 사이였다.
오효철은 힘이 천하장사였다. 선수들중에서도 최고였다. 지구력이 좋고 끈기도 대단했다. 문제는 테크닉이었다. 마구잡이 불도저였다. 이동우는 젊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특별히 내세울 건 없었지만 스피드는 셋 중 최고였다.
1988년 3월 레슬링자유형 82kg급 서울올림픽 국가대표 1차선발전. 한명우는 오효철에게 졌다. 힘에 밀렸다. 머릿속으로는 다 아는데 막상 경기를 해보니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다행이 이동우가 오효철을 눌러 희망이 있었다. 2개월후 2차선발전. 이번에는 한명우가 오효철을 눌렀다. 오효철이 헛힘을 쓰게 유도하자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셋이 비슷비슷했다. 서로 물고 물리느라 확실한 강자가 없었다. 누굴 대표로 뽑아도 그만이었다.
국가대표 최종 선발위원회. 대부분의 체급은 쉽게 대표가 결정되었다. 경기결과에 세계대회 자료를 넣으면 되니 논란이 없었다. 자유형 82kg급은 쉽지않았지만 선발위원들은 그다지 신경써지 않았다. 누가 나가도 메달권밖이니까.
“세명이 엇비슷한데 누굴 뽑지”
“그래도 차이는 날것 아닙니까.”
“국내 성적으로만 보면 오효철, 이동우가 조금 앞서고 국제 성적으로 보면 한명우가 그래도 가장 나은데 큰 차이가 없어”
“국제 성적으로 뽑아야 하지 않나요?
“2년 전 성적이라 확실하진 않지. 트레이닝 코치하느라 최근 경기 성적은 없으니까”
“뭐 그러면 이왕이면 젊은 선수를 내보내죠. 경험도 쌓게 하고”
“그럽시다. 젊은 선수는 미래 자산이니까”
“경험을 쌓으면 다음 올림픽에는 메달을 딸 수 있을까요”
“메달은 뭔 메달. 이번에도 그렇고 다음에도 마찬가지야. 82kg급에서 어떻게 메달을 바라보나 . 그저 참가에 의의가 있는거지”
“그러면 미래 자산도 아닌거죠”
“누가 나가도 메달을 못 딸거면 가능성이라도 봐야죠”
“가능성도 다 비슷하게 없지 뭐”
“가능성은 그래도 한명우 아닌가. 경기경험도 가장 많고 트레이닝코치하면서 레슬링에 대한 안목도 늘었다고 하니”
“그렇게 소원하니 한명우가 좋겠네. 나이도 많은데 한풀이라도 하게”
우여곡절 끝에 한명우는 다시 한 번 태극마크를 달았다. 하지만 협회 관계자, 코칭스탭, 후배선수들 누구도 한명우의 올림픽 성공시대를 예측하지 않았다. 한명우 본인도 그러했으니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조를 가르는 추첨장. 모두 긴장상태였다. 2개조로 나뉘어 경기를 하므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선수를 피하면 그만큼 메달권에 가까워 지기 때문이었다. 한명우는 추첨 줄의 비교적 끝쪽에 섰다. 너무 뒤에 서면 고를 수가 없고 너무 앞에 서면 선택할 수 없어서였다. 물론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선 상황을 보고 싶었다. 홈 이점이 있어서 그 정도는 경기위원들도 통제하지 않았다.
큰 통안에 1에서 24까지 숫자가 쓰여 있는 물건이 있었다. 보지는 못하고 손만 넣어 뽑는 것인데 홀수는 A조, 짝수는 B조였다. 한명우는 피하고 싶은 선수들을 줄 앞쪽에 서게했다.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마크 슐츠, 87년세계선수권자 터키의 겐 갈프, 88년세계선수권자 러시아의 탐보프 제프, 그리고 유럽의 최강자 체코의 로이나 조제프는 정말 어려운 상대였다.
항상 여유있는 마크 슐츠가 강자중에선 제질 먼저 뽑기를 했다. 홀수였다. 뒤이어 겐 갈프도 홀수를 뽑았고 탐보프 역시 홀수 였다. 로이나 조제프는 짝수였지만 다 피할 수는 없는 일, 짝수를 뽑기만 하면 일단 성공하는 것이었다.
남은 숫자는 5개. 2개는 홀수고 3개는 짝수였다. 짝수를 뽑을 확률이 조금 더 높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명우는 이미 감을 잡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의 번호표를 보면서 손으로 가늠했고 연습까지 한 터였다. 정확하게 숫자까지 읽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끝자리가 1,3,5인지 2,4,6인지는 만져보면 알 수 있었다.
원통에 손을 넣은 한명우는 고민하는 척 하며 이리저리 숫자를 만졌다. 이거다 싶은 순간 번호를 뽑아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짝수였다. 강적들이 모여있는 A조를 피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비교적 만만한 일본, 유고, 몽고 등과 한조였다. 조제프가 문제였지만 74kg급 경기에서 이긴 경험이 있어서 해볼만 했다. 더욱이 희망적인 게 조제프와 3차전에서 맞붙게 대전표가 짜여졌다.
한명우는 3차전을 가장 좋아했다. 다른 선수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는 늘 3차전 컨디션이 가장 좋았다. 1차전은 긴장감이 있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2차전은 몸이 덜 풀리는 편이지만 세 번째 경기는 최고의 컨디션에서 맞곤 했다. 부전승으로 한경기를 건너 뛴 한명우는 약체들과의 1,2차전을 손쉽게 통과했다.
행운 3라운드-찢어진 이마와 붕대
조제프는 역시 만만찮았다. 앞의 두 선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조제프도 다르지 않았다.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한명우는 그의 아주 작은 동작과 근육에서 긴장감을 보았다. 몸이 굳은 상태라면 스피드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한명우는 조제프의 팔을 이리저리 내치다가 그가 잠깐 머뭇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태클을 걸었다. 생각보다 쉽게 발을 잡고 흔들어 1점을 먼저 얻었고 뒤이어 또 1점을 땄다. 후반부에 힘이 떨어져 공격을 당했지만 2-1로 이겼다.
한명우는 메달이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A조는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 물고 물리면서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경기전 거드름을 피우며 금메달을 자신했던 마크 슐츠가 겐 갈프에게 나가떨어지면서 메달권에서 조금 멀어졌다. 겐 갈프는 탐보프 제프를 만나 고전을 면치 못했고 담보프는 슐츠에게 곤욕을 치루었다.
4차전 상대는 일본의 이또였다. 이또는 대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패전을 기록한 이또는 죽기살기였다. 한 번 더 지면 메달권에서 영영 멀어지므로 그로서는 마지막 경기인 셈이었다. 기술은 시원찮았지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 힘이 부치긴 했다. 백전노장의 노련미로 들어오는 힘을 역이용, 2점을 따내자 이또는 온몸을 다 던져 몰아붙이려 했다. 그러다 그의 머리가 한명우의 이마를 강타했다.
순간 한 줄기 피가 솟구치며 이마골을 타고 눈으로, 입으로 들어갔다. 급히 타임을 외치며 주저앉고 말았다. 관중석에선 비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판은 경기일시중지 사인을 내고 한명우의 부상을 살펴보았다. 가운데 손가락 길이 만큼 찢어지는 중상이었지만 경기중이어서 붕대를 칭칭 두르는 임시 조치밖에 할 수 없었다.
다시 경기를 속행했다. 이또는 기세를 잡은 양 또 밀어붙였다. 붕대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안타까움의 상무 체육관이었지만 한명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한명우는 1점도 내주지 않고 2점을 더 땄다.
여덟바늘을 꿰맸다. 닥터는 꿰맨 자리위에 흰 천으로 된 붕대를 꼭꼭 감아 돌렸다. 격렬한 경기여서 흐트러질게 뻔했고 꿰매긴 했지만 피가 여전히 나올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결승진출까지 남은 경기는 2경기. 모두 이겨야 조1위를 할 수 있었다. 5차전은 유고선수였고 6차전은 몽고의 슈밧. 강적은 아니었다.
한명우는 맷트에 들어서기 전 이마의 매만지며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너무 세게 당겨 불편했다. 뭔가 위축되는 느낌이 싫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경기중 붕대가 풀어지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이또와의 경기중 붕대를 고쳐매는 시간만큼 휴식을 취해 쉽게 경기를 끌어나갈 수 있었던 점을 떠올렸다. 이마는 찢어졌고 선혈이 낭자해 관중들에겐 처절하게 보였지만 사실 경기력이 현저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집중력은 덜했지만 그보다는 중간 중간 쉬는 게 더 나았다.
‘피맺힌 붕대’는 33세의 저질체력을 만회하게 해주는 도우미였다.
초반 강공, 후반 휴식의 전략을 세웠다. 테크닉으로 선취점을 얻고 나면 이마를 잡고 벌렁 누웠다. 한명우로선 꾀병이지만 심판으로선 말릴 수 없었다. 피가 낭자하게 묻어나고 그로인해 붕대끈도 풀어졌다. 아주 합법적인 경기 중 휴식으로 5,6차전을 마저 이겼다.
조1위, 은메달은 확보했다.
한명우는 6차전을 마친 후 속에 있는 모든 걸 다 토했다. 서있을 힘조차 없었다. 쉬면서 했다곤 하지만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결승까지 시간이 있지만 체력을 회복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올림픽 출전을 처음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꿈꾸지 못했던 은메달 아닌가. 그만 둘까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TV등을 통해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포기한단 말인가.
A조 1위는 겐 갈프였다. 난적인 마크 슐츠는 러시아의 탐보프에게도 져 3위로 밀려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 금메달후보들끼리의 싸움은 과연 치열했다. 셋 모두 상처투성이였다. 들리는 말로는 겐 갈프가 예선최종전에서 팔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한명우와 겐 갈프는 금메달전, 로이나 조제프와 탐보프는 동메달전, 그리고 슈밧과 마크 슐츠는 5위전을 치르는 구도였다. 평소실력이 더 낫지만 엄청난 격전을 치른 탓인지 A조 선수들은 둘 다 B조 선수들에게 패했고 이제 금메달 결정전.
과연 겐 갈프는 오른쪽 팔에 부상을 입었을까. 한명우는 꽉 조인 붕대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하면서 제발 그러기를 갈망했다. 체력이 다소 회복되었지만 1분만 뛰면 마찬가지였다.
겐 갈프라고 다르지 않았다. 격전을 치르느라 그 역시 체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더욱이 오른 팔을 다쳐 승산이 없었다. 차라리 은메달에 만족하고 기권하고 싶은 상태였다.
한명우는 경기 시작과 함께 겐 갈프의 오른 팔을 가볍게 잡아 당겼다. ‘팔 당겨 눕히기’는 한명우의 주특기였다. 팔부상의 사실 여부를 가늠하기위해 슬쩍 당겼을 뿐인데 겐 갈프가 딸려들어 왔다.
“사실이었습니다. 힘을 전혀 못쓰더군요. 30초만에 선취점을 땄죠. 제가 점수를 땄다기보다 그가 점수를 알아서 내주는 꼴이었습니다. 그 기술을 계속 쓰면 2~3분안에 테크니컬 폴승을 거둘 수도 있겠더라고요. 하지만 그 순간 고통스러워 하는 그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더 이상 다친 팔을 공격하지 않기로. 그 팔을 공격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판단도 섰죠. 겐 역시 팔을 다친데다 예선전에서 힘을 다 쏟아 힘이 없었습니다. 겐 갈프도가 나중에 굉장히 고마워했죠. 더 심하게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서 기권할 생각까지 했다더군요. 안 아프게 해주고 기권도 안하게 해줬다면서요.”
피 맺힌 붕대와 함께 한 한 맺힌 금메달.
한명우는 불가능의 나이에 도저히 딸 것 같지 않았던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그렇게 획득했다. 이마를 버팅으로 찢어 실제로는 도움을 준 이또의 나라 일본은 한명우를 서울올림픽 최고의 선수로 뽑았고 피맺힌 붕대는 오랫동안 한명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