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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 다이아몬드를 누비는 ‘불혹의 청년들’

- 은퇴 예고한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
-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타자 ‘추추 트레인’ 추신수
- 한걸음 한걸음이 신화가 되는 ‘끝판대장’ 오승환
- 역대 최장 22년 원클럽맨 김강민

정태화 기자 | 2022-09-0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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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 기자] KBO 리그에서 1982년생은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다. 프로야구 출범 원년에 태어나 프로야구의 슈퍼스타들을 보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운 이들 세대에서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교 3학년인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1981년 초대 대회 우승에 이어 19년만에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한 세대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프로에 들어와 최고의 자리에 올라 ‘프로야구의 레전드로 그리고 성공의 대명사’로 거대한 족적을 쌓고 있다. 많게는 20년이나 어린 후배들과 경쟁을 하며 지금도 ‘불혹의 청년’으로 다이아몬드를 누비고 있는 이들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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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

KBO 리그의 41년 역사에서 은퇴식과 은퇴경기를 가진 선수는 90명을 훌쩍 넘기지만 은퇴투어를 한 선수는 단 2명 뿐이다. 바로 2017년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에 이어 이대호가 사상 두 번째이다.

이대호의 은퇴투어는 10개 구단 최고의 스타들이 모두 모인 7월 16일 2022 KBO 올스타전을 시작으로 테이프를 끊었다. 올스타전 클리닝 타임 때 허구연 총재와 이승엽 총재특보가 이대호의 활약상을 담은 일러스트를 사직 야구장의 흙과 1루 베이스가 담긴 액자를 선물하면서 은퇴 투어의 시작을 알렸다. “덕분에 감사했습니다”라고 적은 유니폼을 입고 올스타전에 나선 이대호는 그라운드에서 큰 절로 팬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그동안 팬들의 사랑에 감사를 표했다.

이대호의 은퇴투어는 이렇게 올스타전을 시작으로 7월28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 8월 13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 8월 23일 창원 NC 다이노스전, 8월 28일 인천 SSG 랜더스전, 8월 31일 고척 키움 히어로즈전, 9월 8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전, 9월 18일 수원 kt 위즈전, 9월 20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 9월 22일 잠실 LG 트윈스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부산에서 은퇴식을 거행한다.

이대호는 2001년 데뷔해 올해까지 KBO 리그에서 활약한 17시즌(2011년~2016년 해외 진출) 동안 도루와 신인상을 제외하고 타자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수상한 기록의 사나이다.

은퇴시즌에 타격 1위까지 올라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1순위(당시 1차 지명은 추신수)로 입단해 올시즌까지 17시즌(2012년~2016년 해외진출 제외) 동안 KBO 리그 수상 경력을 보면 2010년 정규리그 MVP를 비롯해 골든글러브 6회(1루수 4회, 3루수 1회, 지명타자 1회), 타율 1위 3회(2006년, 2010년~2011년), 최다안타 1위 2회(2011년~2012년), 홈런 1위 2회(2006년, 2010년), 타점 1위 2회(2006년, 2010년), 득점 1위 1회(2010년), 장타율 1위 3회(2006년~2007년, 2010년), 출루율 1위 2회(2010년~2012년)에 이른다.

특히 이대호는 타격 트리플크라운(타율·홈런·타자)을 2번이나 석권했으며 2010년에는 도루를 제외한 타격 7개 전 부문에서 1위에 오르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남겼다. 또한 이 해에는 8월 3일 두산전부터 8월 14일 KIA전까지 9게임 연속 홈런으로 세계신기록도 세웠다. 3개 포지션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것도 양준혁과 함께 단 2명뿐이다.

뿐만 아니라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해 오릭스 버팔로즈(2012년~2013년)에 이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인 2014년과 2015년에는 연거푸 일본시리즈 우승과 함께 일본시리즈 MVP까지 석권했다. 또 2016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1년간 활약한 뒤 2017년 롯데로 복귀했다.

‘조선의 4번타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국가대표로서의 성적도 대단하다. 국제대회에 총 41경기에 나서 133타수 43안타(타율 0.323), 7홈런, 41타점을 기록했다.

한국 타자 가운데 최초로 한국·일본·미국 1군 리드에서 뛰고 세 리그에서 모두 두 자리수 홈런을 기록한 유일한 한국인 타자인 이대호도 유일하게 못 이룬 것이 있다. 바로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롯데는 지금까지 1984년과 1992년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으나 모두 이대호가 입단하기 전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에 롯데와 FA 계약을 하면서 이대호는 꼭 은퇴를 하기 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강력하게 나타냈고 계약서에도 우승 옵션을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프로 통산 3000 안타 도전을 권유해 주세요”

이대호는 은퇴시즌인 올해 더 힘을 내고 있다. 40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활약이다. 이대호는 자신의 40번째 생일을 맞은 6월 21일 타율을 0.353(249타수 88안타)까지 끌어 올리며 타율 1위에 등극해 KBO 리그 사상 최초로 40대 타격왕 탄생 희망도 갖게 만들었다.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홈런은 15개를 넘어섰고 2018년 이후 4년만에 3할 타율도 가시권이다.

이렇게 시즌 초반부터 맹활약을 하자 이대호의 예고 은퇴를 아쉬워하며 은퇴를 번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의외로 많다. ‘국민 감독’ 김인식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8월 23일 ‘야구의 날’ 기념식에서 “이제 몇 달 안 남았는데 은퇴를 한다니 아쉽다, 세월은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지만 은퇴를 미리한다고 하니까 그렇다”면서 아쉬워했다.

또 많은 팬들은 “앞으로 프로통산 3000안타를 기록할 수 있는 마지막 한국선수가 이대호일지도 모른다”면서 “한국, 일본, 미국을 포함해 이대호가 3000안타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한국야구 관계자와 팬들이 현역 연장을 강력하게 권유해 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대호는 8월 14일 의미있는 기록을 추가했다. 이날 광주 KIA전에서 2안타를 날려 한·미·일 통산 안타수가 2843개로 늘어나 KBO 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 ‘국민 타자’ 이승엽이 기록한 통산 2842개의 안타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이대호는 은퇴와 관련해서는 초지일관이다. 공개적으로 은퇴번복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은퇴투어도 시작했다. 이제 은퇴를 만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의견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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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추 트레인’ 추신수

추신수는 부산고를 졸업한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를 거쳐 2005년 시애틀 매리너스를 시작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2006~2012년), 신시네티 레즈(2013년), 텍사스 레인저스(2014년~2020년)에서 16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감하고 지난해 SK 와이번스를 인수해 출범한 SSG 랜더스의 일원으로 연봉 27억원으로 역대 최고 연봉으로 KBO 리그에 입성했다.

메이저리그에 핀 코리안드림

추신수가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 성공 이면에는 인내와 노력, 그리고 좌절을 딛고 일어선 오뚜기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4년의 마이너리그에서 착실히 단계를 거쳐 2005년 메이저리그로 올라선 추신수는 그동안 시애틀 매리너스를 시작으로 4개 팀을 거쳤다.

시애틀에서 첫 메이저리그 데뷔는 했지만 가능성은 클리블랜드에서 인정을 받았고 신시내티에서 꽃을 피웠으며 텍사스에서 메이저리그 유종의 미를 장식했다.

이동안 추신수는 2009년 146경기에 나서 타율이 처음으로 3할(0.300)에다 20홈런 86타점 89득점 21도루를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로 첫 3할 타율–20홈런-20도루를 기록하며 이름을 세계 무대에 알렸다. 이 여세를 몰아 2010시즌에는 144경기에 나서 2년 연속 3할 타율에 OPS 0.885(출루율 0.401, 장타율 0.484)와 함께 21홈런 90타점 81득점 22도루로 2년 연속 20-20클럽에 가입했고 90타점은 커리어하이 기록이었다.

추신수 최고의 해는 2013년이었다. 154경기에서 21홈런 20도루 54타점 107득점으로 리드오프로 내셔널리그 첫 20홈런-20도루-100득점-100볼넷의 기록을 세웠다.

이 대활약을 바탕으로 7년 총액 1억3000만달러의 아시아 출신 타자로 최고액을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자리를 옮겼지만 텍사스에서의 7년도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진과 재기, 그리고 다시 부진 등 부침이 이어졌다. 특히 텍사스에서의 첫 시즌은 123경기에 나서고도 12홈런 40타점 58득점으로 전체적으로 저조한 최악의 2014시즌을 보낸 이후 2015시즌에는 후반기에 거짓말처럼 반등해 이해 7월 22일(한국시간) 미국 콜로라도주 데버 쿠어스필드에서 열린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 7번타자로 등장해 아시아인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 이 사이클링 히트를 기점으로 추신수는 이해 9월에 28경기에서 타율 0.404, 출루율 0.525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전체 타자 중 가장 높은 타율과 출루율로 2008년 9월 이후 두 번째, 그리고 한국인 메이저리거로도 1998년 7월 박찬호에 이어 두 번째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선수’에 뽑혔다.

이렇게 최고의 해를 보냈지만 이후 추신수는 2018년에는 52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세우며 올스타에 당당히 선정될 될 정도로 좋은 성적을 내다가도 후반기에는 부진으로 전혀 다른 선수가 되는 등 텍사스에서 계약기간을 마칠 때까지 2015년 시즌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신수는 메이저리그 통산 1652경기 7157타석 1671안타(타율 0.275) 218홈런 782타점 157도루 출루율 0.377, 장타율 0.447, OPS 0.824로 아시안인 최다 홈런과 최다타점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KBO 리그에 끼친 선한 영향력

추신수가 KBO 무대로 돌아오자 대부분 전문가들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타자라는 점을 감안해 타율 3할-30홈런을 예상했지만 2021년 137게임에 나서 122안타(타율 0.265), 21홈런 69타점 25도루 115사사구 123삼진에 그쳤다. 27억원이라는 연봉에 비해서는 저조한 성적이다. 다만 KBO 리그 입성 첫해에 단 3명만이 기록한 20-20클럽에 가입함으로써 여전히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했다.

하지만 추신수의 가치를 단순히 연봉 대비 성적으로만 따지기는 어렵다. 바로 추신수의 합류로 팀에 끼친 영향은 사실 금액으로 따지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추신수는 SSG의 선수들과 첫 대면한 자리에서 “놀러 온 거 아니다. 경험하러 온 거 아니다. 이기려 왔다. 목표는 이기는 것”이라며 선수들의 정신자세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추신수의 이 말은 선수들에게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후배들에게 조언과 격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올시즌 전반기 마지막 1위 고수의 싸움이 걸린 키움과의 2연전을 앞두고 선수단 단톡방에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해라”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선수단을 한마음으로 묶은 촌철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 시절부터 많은 선행으로 하는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2020년 3월 코로나19 대확산으로 리그가 중단되자 월급을 받지 못하는 텍사스 산하 마이너리그 선수 191명 전원에게 1천달러씩 전달했다. 마이너리그에서 오래 뛰었기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어려움을 헤아린 마음씀씀이였다.

국내에서는 코로나19가 가장 먼저 확산한 대구시에 성금 2억원을 전달했고 연봉의 상당 부분을 사회 공헌에 사용했다. SSG 입단 당시 자신에게 등 번호를 양보한 이태양에게 2천만 원이 넘는 시계를 선물하는 가 하면 모교인 수영초, 부산중, 부산고에 총 6억원의 야구 장학금을 전달하고 SSG 구단 내 저연봉 선수들에게 4천만 원 상당의 개인 야구용품을 지원했다. 지난해 가을에는 인천시 유소년 선수 468명에게 보온 점퍼를 전달하기도 했다.

추신수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서 야구를 하고 있어요. 작은 것에도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냥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도 더 기쁘고, 어쩔 때는 더 속상하고 그래요”라며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의 선한 영향력이 올시즌 SSG의 선두 독주에 한 부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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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판 대장’ 오승환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은 한국야구 마무리 투수의 대명사다. 세이브에 관련된 모든 기록은 오승환을 통해서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오직하면 별명이 ‘끝판대장’ ‘끝판왕’이라고 붙었을까?

한국야구 불세출의 투수 선동열은 “승환이는 저보다 제구력이 좋고 직구 회전력이 좋아요”라고 했고 류중일 감독은 “오승환 덕분에 삼성은 8회까지만 야구를 하면 된다”고도 했다. 그만큼 오승환은 마무리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세이브 기록의 신화를 쓰고 있는 오승환

오승환은 KBO 리그의 세이브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역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화라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오승환은 입단 첫해인 2005년 신인으로 첫해에 61경기에 나서 99이닝 10승1패 16세이브 11홀드를 올리며 한시즌에 10승-10세이브-10홀드인 소위 ‘트리플더블’을 세웠다. 이 ‘트리플 더블’은 KBO 역사에서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밟지 못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오승환의 평균자책점은 1.18, 블론세이브는 1개뿐이었고 탈삼진도 무려 115개나 됐다. 그리고 이해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2세이브로 선동열 감독에게는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과 함께 삼성에게 3번째 우승을 안겼고 당당히 신인상과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됐다.

이렇게 프로입단 첫해부터 화려하게 시작한 오승환의 KBO 리그 마무리 기록은 그야말로 다채롭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2006년 63게임에서 47세이브를 거두며 KBO 리그 역대 3번째 40세이브 돌파에 최연소 40세이브 기록(24살1개월26일)과 함께 역대 한시즌 최다 세이브, 아시아신기록까지 세웠다. 프로 3년차를 맞은 2007년 9월 18일 광주 KIA전서 35세이브째를 올리며 역대 최소시즌(3시즌), 최소경기(180경기) 100세이브를 기록했고 그 뒤 5세이브를 더 보태 2년 연속 40세이브를 기록한 첫 번째 투수가 됐다.

이어 2009년 5월 5일 대전 한화전에서 최연소·최소경기 150세이브(26세9개월20일·254경기), 2011년 8월 12일 대구 KIA전 세이브로 역시 최연소(29세 28일), 최소경기(334경기) 200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소경기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2년 7월 1일 대구 넥센전에서 개인통산 228세이브를 올려 이전까지 최다세이브였던 김용수의 227세이브를 넘어섰다.

일본과 ML에서도 통한 마무리 위력

KBO 리그에서 277세이브를 거두고 2014년 한신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오승환은 일본에서도 최정상급 마무리로 군림했다.

일본 진출 첫해인 7월 21일 일본야구의 성지인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세이브를 올려 한·일 개인 통산 300세이브째을 챙겼고 이해 39세이브를 기록해 1997년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기록한 38세이브를 넘어 일본 무대 한국인 최다 세이브 기록을 세웠다. 또한 이해 오승환은 클라이맥스시리즈 6경기에 모두 등판해 시리즈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하는 영광도 누렸다. KBO 리그 출신 한국인이 일본 포스트시즌에서 MVP를 수상한 것도 처음이었다. 오승환은 2015년에도 41세이브를 올려 2년 연속 센트럴리그 구원왕에 올랐다.

일본 생활을 마치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2016년~2017년)로 메이저리그로 자리를 옮긴 오승환은 첫해인 2016년 7월 3일 부시스타디움에서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첫 세이브를 올려 한국인 최초 한·미·일에서 세이브를 거두었다.

메이저리그 첫해 오승환은 76게임에 나서 79⅔이닝을 던지며 6승3패 19세이브 14홀드를 기록하는 등 세인트루이스에서 2년을 포함해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콜로라도 로키스를 거치면서 메이저리그 통산 16승13패 42세이브(평균자책점 3.31)을 기록했다.이렇게 오승환은 일본에서 80세이브, 미국에서 42세이브를 거두고 2019년 9월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삼성으로 유턴한 뒤 72경기의 징계를 마치고 2020년 6월 9일 키움전을 시작으로 다시 국내 무대로 복귀했다.

여전한 경쟁력 보여…은퇴 시기는 미정

KBO 리그로 복귀한 오승환의 세이브 행진은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복귀 첫 해인 2020년 6월 16일 4번째 게임인 잠실 두산전에서 복귀 첫 세이브를 올리며 한·미·일 통산 400세이브를 달성했고 2020년 8월 14일 대구 두산전에서는 408번째 세이브로 일본 언론이 ‘아시아 최고 기록’이라고 명명한 이와세 히토키(은퇴)의 407세이브를 넘어섰다.

복귀 2년차인 2021년 4월 25일 광주 KIA전에서 KBO 리그 개인통산 300세이브의 금자탑을 쌓았고 이해 10월 13일 KIA전에서는 40세이브째를 올리면서 최고령(39세2개월28일) 40세이브 기록과 함께 통산 4번째 40세이브의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전 최고령 시즌 40세이브가 2013년 손승락이 세운 31살6개월10일인 점을 감안하면 오승환의 이날 40세이브 달성이 나이를 잊은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쉬 짐작이 간다.

KBO리그에서 ‘단일 시즌 40세이브’는 지금까지 총 7차례 나왔다. 이 가운데 오승환이 4차례나 되니 오승환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불혹’의 나이가 된 오승환은 올시즌 5월 19일 대전 한화전에서는 350세이브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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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원클럽맨’ 김강민

‘눈과 다리는 슬럼프가 없다’는 야구 격언이 있다. ‘눈에 슬럼프가 없다’는 말은 마치 추신수를 두고 하는 말 같고 ‘다리에 슬럼프가 없다’는 말은 김강민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2차 2라운드 18순위에 지명돼 프로에 몸을 담은 김강민은 처음에는 주전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오랜 2군 생활을 겪었다. 어쩌면 평범할 수도 있는 선수라고도 볼 수 있지만 김강민은 입단 한 뒤 지금까지 그 흔한 트레이드도 되지 않은 채 KBO 리그에서 최장인 22년째 원클럽맨으로 활약하고 있다. 외부에 알려진 그 이상으로 팀에 필수불가결한 선수라는 뜻이다.

‘수비의 완전체’ 김강민

지난 8월 20일과 21일 고척 키움전에 이어 23일 문학 삼성전은 마흔에 접어든 김강민이 팀에서 왜 필요한지를 보여 준 대표적인 경기라고 할만하다.

20일과 21일 키움전에서 김강민은 이틀 연거푸 2년차 신인 전의산의 대주자로 나섰다. 20일에는 8-6으로 앞선 9회초 1사 1, 2루에서 전의산이 우전적시타를 날리자 대주자로 나섰고 21일도 8회초에 볼넷으로 나간 전의산을 대신해 대주자로 출장했다.

2000년생인 전의산과 1982년생인 김강민의 나이차는 18년. 팀의 최고참인 베테랑이 새내기의 대주자로 나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이는 바로 김강민이 전의산에 견주어 타구에 대한 감각이나 주루 센스가 훨씬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대주자로 나선다고 해서 김강민의 타격 솜씨가 나쁜 것도 아니다. 23일 삼성전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SSG가 2-3으로 뒤지던 8회말 한유섬이 1사 1, 2루에서 우중간 2루타를 터뜨려 4-2로 역전을 한 뒤 전의산의 고의 볼넷으로 만든 2사 1, 2루에서 박성한의 대타로 등장해 삼성의 불펜 이상민을 상대로 쐐기 3점 홈런포를 날려 팀을 3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김강민은 중견수 수비에 관한한 한국최고의 외야수비라는 평을 듣는다. 빠른 발과 날아오는 타구에 대한 빠른 판단력, 넓은 수비 범위, 투수 출신답게 강한 어깨를 겸비하고 있는 덕분이다. 타자의 타격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이미 판단을 마치고 낙구 지점까지 뛰기 시작한다. 이 바람에 다른 선수들이라면 다이빙캐치로 어렵게 잡아 마치 파인플레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강민은 여유있게 잡는다.

여기에다 펜스 근처까지 깊게 날아오는 타구를 등 뒤로 쫓아가 잡는 경우에도 대단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김강민의 수비에 대한 비유 가운데 하나가 ‘나성범의 어깨에 박해민의 수비 범위’라고 말할 정도다. 그야말로 수비에 관해서는 완전체라도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 수비 솜씨는 마흔이 된 지금도 여전히 건재해 ‘발에는 슬럼프가 없다’는 말을 실증해 준다.

이러한 수비 솜씨에 견주어 타격은 10년차가 된 2010년부터는 타격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이해 처음으로 팀내에서 가장 높은 3할대 타율(0.317)로 전체 타격 8위에 올랐다. 10개의 홈런에 23개의 도루까지 성공해 언제든지 10홈런에 10도루 이상은 성공할 수 있는 타자로 자리잡았다. 이후에도 김강민은 2할 6푼~7푼대의 타율을 꾸준하게 유지하고 수비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22년을 원팀에서, 그리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만약 올시즌 개막전부터 선두를 내달리기 시작한 SSG가 시즌 마지막까지 1위를 유지하며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달성하고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하게 되면 김강민에게는 또 다른 훈장이 하나 붙게 된다. 바로 20대, 30대, 40대의 나이에 한국시리즈 우승 커리어를 달성하는 KBO 최초의 선수가 된다. 40대 선수의 특권이랄 수 있다.

[정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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