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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 [멋과 맛] 정동길

이신재 | 2022-10-0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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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지금도 과거이다

정동길은 과거로 가고 있다. 그래서 늘 아늑하고 편안하다.

덕수궁 돌담을 넘어온 키 큰 나무들이 돌담길의 봄을 더욱 푸르게 한다. 신록의 향연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돌담길 끝 광장부터 양옆에 늘어선 은행나무들은 가을을 노랗게 물들인다. 10월 말쯤 되면 떨어진 은행잎들이 샛노란 축제를 벌인다. 노랗게 변해버린 길은 아무도 쓸지 않는다. 그 자체가 아름다운데 뭐 하러 쓸어내겠는가.

돌담길 맞은 편 시립미술관. 법원 골목의 조금은 살벌한 냄새를 다 없앴다. 군데군데 새로 들어선 수목이 여기저기 있던 높다란 건물들의 자취를 지워버렸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돈의문 터 앞 경향신문사까지의 정동길. 1km도 되지 않는 작은 길이지만 언제나 ‘걷고 싶은 길’ 1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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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정동길

그 길은 별세상이다. 큰길에서 고작 한 발짝 꺾었을 뿐인데 푸르름으로 가득 차 있다.

서울은 바쁘다. 금방금방 바뀐다. 과거의 흔적이 없어지고 새로운 현대가 들어선다.

그러나 정동길은 있던 현대의 모습마저 지우고 과거로 돌아갔다. 역사에 무례했던 시절, 덕수궁 서울시청 쪽 연못은 겨울철 어린이 스케이트 장이었다. 덕수궁 한쪽 귀퉁이에는 파출소가 들어섰다.

지금 그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들 하지만 사실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때의 아픈 기억이다.

이젠 누구도 그 길을 험하게 다루지 않는다. 덕수궁, 정동제1교회, 예원학교, 배재, 이화학당, 창덕여중, 그리고 경향신문. 건드리면 안 되는 곳, 역사를 되살려야 하는 그들이 있어 정동길은 만질 때마다 번잡한 현대가 아니라 조화로운 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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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과 경희궁은 연결된 곳이었다. 덕수궁 뒷길을 따라 상림원에 이르면 경희궁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오랫동안 끊겨져 있었다. 세실극장, 성공회 쪽은 영국대사관이 길을 막았고 덕수궁 뒷길은 미국 대사관이 버티고 있었다.

그 길은 1986년 고종이 아관파천 했던 슬픈 길. 한 나라의 왕이 왕세자와 함께 일본을 피해 도망가다시피 했던 좁은 뒷길이었다.

아관은 러시아대사관. 당시 우리가 불렀던 러시아의 이름은 아라사였고 그래서 아관이었다. 강대국 대사관이 모여 있던 정동으로 정동 4번지에 영관(영국), 10번지에 미관(미국), 15번지에 아관, 28번지에 법관(프랑스)이 있었다.

미, 영 대사관들이 막고 있던 아픈 역사의 이 길을 2018년쯤 되살렸다. 길은 120m 남짓. 영국대사관 철문 자리를 조금 파고들어 덕수궁 돌담길 안쪽으로 길을 냈다. 전부는 아니지만, 공짜로 덕수궁의 일부를 눈으로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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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안길

돌담길이 끝나는 곳, 오른쪽은 구세군이고 덕수초등학교를 지나 광화문으로 향한다.

왼쪽은 다시 덕수궁 뒤 돌담길. 연인이 걸으면 안 된다고 했던 그 ‘덕수궁 돌담길’이다. 그냥 속설인데 그 길 끝에 가정법원이 있어서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었을 테고 그 옛날엔 쉴만한 곳이 없어 길 끝에서 바로 헤어지는 바람에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나중엔 헤어지고 싶으면 일부러 그 길에서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맞은 편 골목 돌담길은 정동공원으로 향하는 길. 아관파천의 길이다. 미 대사관과 옛 경기여고 뒷길 쪽을 개방해서 길을 이으면서 고종의 길, 왕의 길로 명명했는데 길 이름이 석연찮다. 정동공원은 예원학교와 경향신문 뒤에 위치한 녹지. 옛 아라사 공관은 없고, 오랜 쪽 높은 곳에 종탑 같은 전망대만 한 채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곳이 상림원. 왕자들이 뛰어놀았던 곳이라는데 근처에선 가장 높다. 이곳에 경희궁으로 가는 다리가 있어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힘들었던 시절 박치기로 우리 국민들의 한을 달래주었던 박치기 제왕 김일의 체육관이 들어섰다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문화체육관으로 바뀌어 명랑운동회 등 MBC-TV의 공개방송 터가 되었다. MBC가 여의도로 떠난 후 프로복싱 신인왕, 탁구장 등으로 사용되었고 마당놀이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뮤지컬 맘마미아를 끝으로 한 시대를 마감했다.

지금 그곳에 옛날 이름을 살린 상림원이 들어섰다. 물론 그 상림원은 아니고 거주시설이다.

정동공원에서 왼쪽으로 틀면 다시 예원학교가 나온다. 오른쪽은 캐나다 대사관. 우리나라 최초의 손탁호텔 앞터로 손탁호텔은 커피숍의 원조이기도 하다.



단풍나무, 은행나무 그리고 600년 회화나무

캐나다 대사관 앞엔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회화나무가 있다. 60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하지만, 공식적으론 5백60~70년이다. 키 17m, 둘레 516cm로 1976년 서울시가 보호수로 지정했다. 사방으로 가지가 뻗쳐있다.

캐나다 대사관을 자세히 보면 안쪽으로 많이 들어갔다. 회화나무에게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선사하려는 조치로 덕분에 한때 상태가 좋지 않았던 나무는 지금 더 싱싱해졌다.

회화나무 맞은편은 이화 100주년 기념관과 붉은 벽돌의 정동제일교회.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다.

광화문 연가는 ‘언덕 밑 정동길’과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을 읊었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정동길을 시작하는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 붉은 벽돌 건물로 결코 작지 않다. 결혼식장으로도 사용될 정도로 작가 나혜석이 식을 올렸던 곳. 아주 분위기가 있다. 그곳에 들어서면 믿지 않아도 믿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정동제일교회는 붉은 벽돌 건물의 원조. 예원학교 옆의 옛 신아일보 건물과 정동교회 옆 건물도 정동교회를 따라 붉은 벽돌로 지어 운치를 더했다.

덕수궁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시청 앞에서 돈의문 터까지 바삐 걸으면 땀이 배어 나올 정도는 된다. 지금이야 ‘언덕 밑’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 옛날엔 오른쪽이 어느 정도 높은 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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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 건물 옆 오르막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이 길에선 제법 변화가 심했던 곳이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설립된 근대적 사법기관 평리원이 있던 자리로 경성재판소를 거쳐 대법원으로 이어졌다가 2002년 현재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정동교회 왼쪽은 배재학당이 자리했던 곳. 배재공원이 되면서 정동길의 멋을 더하고 있다. 배재공원 끝은 러시아 대사관이고 길은 서소문으로 이어진다.

시청역 2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시작되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의 끝은 맨 꼭대기에 송수신탑이 있는 경향신문.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이수근의 작품이다. 건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험한 근·현대사를 겪은 현장이기도 했다.

처음엔 MBC 사옥으로 호텔 겸용이다. 박정희 정권은 야성이 너무 강한 경향신문을 죽이기 위해 MBC와 묶었고 전두환 신군부는 방송과 신문 겸업을 막는다며 둘을 떨어뜨린 후 MBC를 여의도로 보냈다. 지금은 경향신문 건물이지만 땅은 박정희, 육영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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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이 더 맛있는 곳. 그래도 맛집은 덕수정, 남도 추어탕

정동길에선 굳이 먹을 것을 찾지 않아도 된다. 풍광 자체가 아름다운 맛이다. 가볍게 걸으면서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여유로 채우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서인지 이 길에는 맛집이 별로 없다. 오래된 맛집이 2곳 정도에 불과한데 수십 년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간판부터 촌스럽기 그지없다. 현대식 멋스러움이 없는 두 곳 모두 특별한 맛이 있다.

정동극장 옆 골목길을 끼고 30m 사이로 있다. 큰 길가의 덕수정은 물려받은 주인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정확하게 잘 모른다. 1970년대에도 있었고 당시 주인이 10년 넘었다고 했으니 50년은 족히 넘었다. 간판을 보면 괄호 열고 괄호 닫고 ‘구 학생사’라고 쓰여있다.

학생사라는 이름이 가르치듯 메뉴도 뻔하다. 생삼겹살, 삼치구이, 부대찌개, 오징어볶음 등이다. 어느 동네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음식 중의 하나지만 꽤 먹을 만하다. 부대찌개는 나름 얼큰한 맛과 감칠맛이 있고 삼치는 노릇노릇 잘 굽는다. 생삼겹삽은 늘 싱싱한 특제만 상에 올린다. 자그마한 동네 맛집이라고 보면 된다. 배고파서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크게 만족하고 나오는 집이다.

남도추어탕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충 알아서 부르는 이름이다. 간판은 추어탕 남도식당 정동집이다. 식당 이름을 굳이 강제로 알게 하는 억압적인 자세가 아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중명전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다. 겉만 봐선 맛집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지만, 추어탕 하나로 유명세를 타는 집이다. 오직 추어탕으로 미꾸라지를 곱게 갈아서 만들어 처음 대하는 사람도 먹기가 좋다. 갖은양념, 청양고추, 산초, 후춧가루가 준비되어 있다.

갈아 만든 추어탕치곤 거친 편이다. 추어탕 맛이 그게 그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도 추어탕을 맛보면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 줄 알게 된다.

점심, 저녁의 식사 시간 때는 큰길까지 줄 서 있다. 대한민국 추어탕 톱10에 충분히 드는 집인데 무교동의 용금옥과는 요리 방법도 다르고 맛 또한 다르다. 맛있는 건 똑같지만...

대략 50년 세월을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그 또한 정동길의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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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 왼쪽 건물은 꽤 오래되었다. 여러 식당이 들락날락했다. ‘무교동 낙지 愛 보쌈’이 십수 년 됐고 나란히 붙은 ‘진미칼국수’가 맛을 자랑한다.

낙지 愛 보쌈의 메인 메뉴는 낙지+조개탕+반찬 약간의 낙조세트. 무교동 낙지와는 다른 맛이다. 무교동보다 덜 맵다. 매운맛과 달달한 맛이 조화롭다. 조개탕을 함께 먹어도 1만6천원이다.

5명 이상이 회식을 겸한다면 콜라보세트도 먹을 만하다. 6만9천원으로 낙지볶음, 보쌈, 조개탕, 부추전이 나와 입맛대로 먹을 수 있다.

정동길 끝의 숨어있는 집 어반가든은 젊은 연인들의 즐겨 찾는 곳. 나름 분위기가 있다. 프란치스코 맞은 편 장수식당 옆길로 들어가면 된다. 길 입구에 간판이 있지만 놓치기 쉽다. 음식은 주로 양식. 파스타 앤 리조또, 샐러드, 피자, 스테이크 류. 분야별로 종류가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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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끝인 듯하지만 다시 작은 길로 연결된다. 남대문까지 1.6km라고 쓰인 이정표를 따라가면 바로 창덕여중 뒷담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꼬불꼬불 가면 순화동이 나온다.

북악산과 남산을 잇는 내사산 성벽길로 ‘역사에 무례한 자’들이 창덕여중 뒷담을 성곽 돌 담 위에 올렸다. 지금은 잘못을 깨닫고 성곽 담 안쪽에 학교 담을 쌓았다.

장수식당도 아주 오래되었다. 갈비탕, 육개장이 국숫값보다 싼 7~8천 원 정도. 그 자리에 식당이 여럿 거쳐 갔는데 그 흔한 TV 맛집에 소개된 적이 없다. 그냥 오래된 식당이다.

오래되었고 세월이 갈수록 더 멋과 여유를 부리는 정동길.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취향을 채우는 카페가 제법 많이 들어섰다. 언제나 계절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는 낭만이 있는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충분하다. 정동극장 안의 공간도 그렇고 덕수정 옆에 그럴 수 있는 분위기의 멋있는 장소가 서너 곳 있다.

길의 끝 맞은편은 돈의문 박물관 마을. 길을 건너가 보는 것도 좋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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