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신인 정치인~국제장애인스포츠단체 수장' 1인 3역
임윤태 변호사(53)를 두고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오지랖이 넓다’고 한다.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오지랖’이라고 하는 데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주제넘게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상대를 비꼬는 말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임윤태 변호사에게 ‘오지랖이 넓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비꼬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변호사라고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항상 웃는 얼굴로 상대의 말을 존중하고 귀를 기울인다.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않고 쉽게 포용한다. 어려운 문제를 상의하면 시간과 금전에 관계없이 무조건 들어주고 해결을 위해 진심을 다한다. 당연히 주변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인간적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변호사 답지 않은 변호사라는 말까지 듣는다,
하긴 오지랖이 넓어야 좋은 점도 있다. 변호사로서 어느 한정된 분야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넓은 교분을 쌓기 위해서는 ‘넓은 오지랖’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태정합동법률사무소 임윤태 대표변호사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담임 선생님 권유로 서울대 정치학과 입학
임윤태는 대전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부산에서 자랐다.
따라서 부산이 고향이고 친구들도 부산출신이 많다.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다. 정치에 관심도 없었는데 정치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재미있다. 그냥 고교 담임선생님의 권유였단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을 많이 하는 바람에 앞장서서 일도 잘하고 제 자신보다는 다른 친구들 배려하고 잘못된 것을 보면 참지못하는 등 나름대로 공정하고 정의를 추구하고 강직한 모습을 보고 담임 선생님께서 서울대 정치학과에 지원하라고 추천을 해서…”
이렇게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을 한 임윤태의 대학생활은 한마디로 부적응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되고, 당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방황하며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다보니 후딱 3학년 1학기가 지났다.
차라리 이럴바엔 군복무나 일찍 마치자는 뜻에서 당장 제일 빨리 갈 수 있는 의경을 지원했다. 지원한지 2개월만에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는 학생이 의경으로 왔으니 자대배치때 경찰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도대체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던 학생에 왜 의경에 왔을까? 정치학과니까 사상이 조금 이상하기는 한 것 같은데 조금 험한 일을 하는 데 보내자니 위에서 뭐라고 할 것 같고 그렇다고 특혜를 주자니 더 이상하고 …”
결국 가장 중간쯤 간다는 동래경찰서에 배치를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군복무를 범칙금 스티커만 정리하다 전역을 했다. 의경지원이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수단이기는 했지만 결코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매일 다른 종류의 수많은 범칙금 스티커를 수기로 정리하면서 법에 대해 나름대로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경에서 3년을 마치고 학교로 되돌아 온 임윤태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완전히 달라진 학교 분위기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학생 운동의 큰 방향이 변하면서 대학 시위문화가 거의 사라졌다. 여기에다 이미 군복무 등을 마치고 복학한 동기생들은 사법시험, 행정고시 준비에 열중하고 있는 등 공부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그러나 임윤태는 제대로 그간의 사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지난 세월 방황하면서 학과공부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냈던 임윤태에게 남은 3학기는 학점을 따고 무사히 졸업을 하는 것이 더 큰 과제였다. 열심히 학업에만 전념하여 졸업에 맞춘 학점을 이수하고 드디어 1995년 2월 졸업을 했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서울대학교 졸업장을 들고도 회사에 취직을 하거나 이력서를 내기도 쉽지 않았다. 공부하는 친구들과 만나 뭘 하면 좋을지를 상의했지만 공부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할 것이 없었다. 6개월 정도 관망을 하다 다시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난 2년 동안 대학 졸업을 위해 공부에 매진해 보았으니 이를 다시 공부로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임윤태가 행정고시보다 사법시험을 택한 데는 단순했다. 행정고시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사법시험은 법 체계가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리에 앉아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이유, 단 한가지였다. 그러면서 법공부는 학교에서 교양정도밖에 이수한 적이 없으니까 기초를 닦는데 3년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때부터 사법시험 공부에 들어갔다. 의경생활 3년에 대학 3학기까지 기간 동안 자리에 오래 앉아 있던 생활이 버릇이 되다보니 사법시험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당초 계획보다 1년 늦은 4년만에 1차, 그리고 2차는 곧바로 합격하면서 2000년 12월 제42회 사법시험 합격자에 명단을 올렸고 2003년 제32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임윤태는 사법연수원 시절이 걱정도 없는 천국이었다고 회고한다. 다른 연수원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탓에 처음부터 검사나 판사로는 임용될 생각은 없어 그렇게 공부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연수원에서 시켜주는 다양한 경험과는 별도로 같은 조 동기들, 서울대 동문들, 고등학교 동문들끼리 서로 일정금액을 떼서 틈나는 대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견문을 쌓았다. 이렇게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로 업무를 시작했다.
‘대입수능 정답오류 사상 첫 승소’
임윤태가 변호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정답 오류’ 사건이다.
대학수학능력 시험 사상 가장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 2014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세계지리 8번 문항 문제였다. 어느 누구도 이상하다는 말만 할 뿐 오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지 않던 이 문제를 임윤태 변호사가 교육당국에 수험생들을 대변해 공식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에 11월 7일 치러진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 오류 문제에 대한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2014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세계지리 8번 문항은 제시된 ‘보기’ 가운데 맞는 것을 고르는 것으로 정답 처리된 보기 ㄷ은 ‘유럽연합(EU)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보다 총생산액 규모가 크다.’였다. 평가원은 ‘EU의 평균 총생산액이 NAFTA보다 많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기재돼 있기 때문에 ㄷ이 정답이라는 주장했지만 실제로 2012년의 실제 총생산액은 NAFTA가 EU보다 많았기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이 문제는 3점짜리로 정답률은 49.89%였다. 그러나 평가원은 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이의심사실무위원회를 열어 논의한 결과 정답에 이상 없다고 최종 결정을 내리고 성적을 통보지만 이후에도 논란이 이어졌고 결국 수험생 59명은 이에 반발해 2013년 11월 서울행정법원에 등급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1심에서는 평가원 주장이 받아들여져 수험생들이 패소했으나, 수험생 22명이 다시 항소한 2심(2014년 10월)에서는 수험생 승소 판결이 나왔다.”
바로 이 소송을 임윤태 변호사가 맡았다. 당시 세계지리에 응시한 수험생은 약 2만8000명, 이중 절반 이상의 수험생이 오답으로 처리된 사건으로 오답으로 처리된 학생의 경우 등급이 바뀌면서 진학 대학 자체가 달라 질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대부분 전문가들은 수능문제 정답에 오류가 있는 만큼 1심부터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이없게 패소했고 더 이상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일부 학생들이 그만 두겠다고 했지만 임윤태 변호사는 끝까지 밀어부쳤다. 과거 사법시험에서 형사정책문제의 출제오류로 3년차때 1차에서 아깝게 떨어졌던 기억이 더욱 그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항소심에서 결과를 뒤집었다. 거의 1년이나 걸려서 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대다수 수험생들은 이미 다른 대학에 진학했거나 포기한 경우가 많아 큰 구제를 받지는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지만 임윤태 변호사의 포기하지 않는 피해 학생들을 대변한 덕분에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오류로 인한 피해자의 대학입학 지원에 관한 특별법’(2014년 12월 30일 제정)이 제정되고 사상 최초로 대학수능시험에 정답 오류를 소송을 통해 바로 잡은 최초의 변호사가 됐다.
고 김근태 고문과 이광환 전 LG 감독과의 귀한 인연
2003년 법무법인 백상 구성원 변호사로 시작한 임윤태 변호사는 2005년부터 2017년까지 몸 담았던 공증인가 장안합동법률사무소 시절 때 자신의 인생항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귀한 인연을 만난다. 바로 당시 민주통합당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광환 야구감독이다.
모든 인연이 우연에서 시작하듯이 김근태 고문과의 인연도 우연에서 시작됐다. 임윤태 변호사는 처음 김근태 고문을 만나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가 2006년경이었다.
“김근태 고문을 보는 순간 마치 얼굴 뒤에서 환환 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면서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든 걸 포용하는 넓은 마음과 평소 대의에 맞게 행동하는 모습, 운동권에서 머물것이 아니라 제도권에 들어와 민주주의를 실천하자고 강조하는 평소 소신, 후배나 보좌진을 대하는 온화한 태도 등 모든 면에서 한꺼번에 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한번의 인연으로 그는 2008년 ‘김근태의 평화와 상생을 위한 한반도재단(김근태 재단)’ 고문 변호사가 됐고 지금도 김근태 재단(구 한반도재단)의 이사와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중이다. 그리고 이 인연은 임윤태 변호사가 다양한 정치인들과 인맥을 쌓는 계기가 됐고 또한 법조인으로 정치인이 되기를 꿈꾸는 단초가 됐다.
생뚱맞기는 하지만 야구인 이광환 전 LG 감독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이광환 감독과는 우연히 참석한 자리에서 “임변 야구발전연구원에 들어와 도와줄래?” 한마디에 야구와의 오지랖 넓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역시 2006년 즈음이었다.
이광환 감독의 권유로 2006년 출범한 야구발전연구원의 멤버가 되었고 2010년에는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베이스볼아카데미 스포츠와 법’ 교수로 2015년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이러한 스포츠와의 인연은 그대로 이어져 한국리틀야구, 한국권투위원회, 대한야구협회, 대한소프트볼협회, 한국여자야구연맹, 서울대야구부 고문변호사, 백구회 부회장, 근대5종 스포츠 공정위원, 각 종목 선거관리위원 등으로 스포츠계와 폭넓은 인연을 맺어왔다.
임윤태변호사는 돌이켜보며, 특히 야구계와 복싱계에서 기득권층을 중심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깊이 고민도 하고 여러 발전방향도 모색해봤으나, 실제 제대로 된 성과가 없었던 것이, 본인이 그동안 받은 혜택에 비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정치인을 꿈꾸는 변호사 임윤태
애초에 임윤태 변호사는 정작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도 정치를 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고 김근태 고문을 만나 한발은 정치판에 발을 들여 놓았으면서도 정작 정치에는 별로 뜻을 두지 않았다. 이미 국회의원을 하는 서울대 동기생도 있고 다양한 정치인들과 인맥을 쌓았지만 그냥 사람들과 어울리며 고문 변호사 역할에만 만족했다. 문턱 낮은 변호사로 살면서 종로 청계천 상인들과 등산도 가고 형님 동생하고 지내면서 어려운 사정도 해결하는 서민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소명이라 여겼다.
이런 그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 전 고문이 선종을 한 뒤였다. 강원도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즐기고 있다가 갑작스런 김근태 고문의 선종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그대로 둔채 서울대병원으로 달려와 닷새동안 빈소를 지켰다. 이 순간 마치 먼 곳에서 김근태 전 고문이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참여하라, 참여하는 자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한다”라는 김근태 고문의 평소 지론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듯한 암시에 험하디 험판 정치판으로 뛰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 가입하고 2016년 총선을 겨냥해 서울 강서지역 쪽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정치판은 공부와 달랐다. 정치 초년병에게 쉽사리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아예 경선에서 탈락했다. 처음으로 쓴맛을 봤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정치적 경력을 쌓으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법률특보와 함께 문재인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국민성장위원회 위원, 문재인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명선거 본부 법률지원단 자문위원을 맡았다.
2018년에는 더불어민주당 박원순 서울특별시장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법률특보와 청소년희망특별위원회 부위원장, 클린선거본부 송부지원팀 팀원을 지냈고 이해 6월부터는 경기도 민선교육감으로 당선된 이재정 교육감과 호흡을 함께 하며 경기도교육감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을 거쳐 이해 9월에는 경기도교육감 고문변호사를 역임했다,
이렇게 다양한 경력을 바탕으로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양주에 출마를 하기 위해 많은 정성과 열정을 기울였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청천벽력같은 전략공천 소식이었다. 중앙당에서 아예 경선도 없이 공천을 하는 바람에 시민들에게 출마의사조차 표명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두 차례 국회의원의 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음이 쓰리고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임윤태 변호사는 그저 ‘허허~~’라며 웃고 넘긴다. 아직 중앙정치판에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라고 자신의 허물만 들추어 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번 대통령선거, 지방선거 등에도 힘을 보탰다.
대통령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조직 부위원장, 지방선거에서는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조직 직능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당대표 선거에서 이재명 선거대책위원회 직능 특별보좌역을 맡아 당선에 힘을 보탰다. 드디어 변방에서만 놀다 비로소 중앙정치의 한복판으로 뛰어 든 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감옥살이를 하고 모진 고문을 이겨내면서도 모두를 포용하는 큰 정치를 한 김근태 고문도 있는데 지금까지의 시련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평소 김근태가 꿈 꾼 따뜻한 경제, 인간적인 정치,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를 위해 내일을 준비한다고 정치철학적 포부를 밝힌다.
장애인e스포츠를 세계의 중심에
우연이 이어지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대한장애인e스포츠연맹 회장과 국제장애인e스포츠연맹 총재를 맡은 것도 우연이 이어져 이제는 필연이 됐다.
2010년 당시 이 단체를 맡고 있던 회장의 소송을 맡은 인연으로 억지로 떠안기는 했지만 장애인들의 복지와 재활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는데다 e스포츠가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이고 국제장애인e스포츠연맹은 우리나라가 장애인e스포츠의 종주국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애착이 갔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장애인에 대한 모든 것이 열악했다. e스포츠에 대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식도 제대로 없었다. 더구나 2000년대 초반 미래 먹거리라고 해 IT 산업을 집중 육성하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을 지나 정책 전환으로 IT에 대한 정책 지원도 시들해 졌을 때였다.
그럼에도 그는 국제연맹 총재를 맡자말자 2012년 제주도에서 사비 1억원을 들여 세계 장애인e스포츠 관계자들을 모아 국제e스포츠 대회겸 국제연맹 총회를 가졌다. 2개국 옵서버, 16개국 참가에 그쳤지만 수확이 적지는 않았다. 미국 싱가폴 등이 적극 협조를 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서울 성북구청에서 다시 세계 장애인 e스포츠 대회를 개최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성북구의 후원을 받아 11개국 200여명의 각국 선수들이 참가한 세계 대회를 성공적으로 열었다.
이렇게 재임 초반 연이어 국제 대회를 개최하고 국내 대회도 경기와 충남 천안 지역 등을 중심으로 활성화됐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대회 예산 조달과 연맹 조직 운영 등에 어려움이 따랐다. 대회 개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여러 여건이 맞지 않아 대회를 갖지 못하는 아쉬움이 이어졌다.
그동안 비장애인들의 e스포츠는 프로까지 생기고 MZ 세대들의 선망의 직업이 되었지만 장애인e스포츠는 답보 상태였다. 대회를 자주 열지 못해 선수들의 기량을 관리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대한장애인체육회 등 주류 사회에서 장애인e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없던 것도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지난해부터 연맹 조직을 재정비하고 언론계, 정치, 사회, 문화, 체육계와 장애인 단체 등 다양한 인사들을 영입해 활성화에 나섰다.
“장애인e스포츠 연맹은 장애인들이 사회에 참여하기 위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최근 e스포츠활성화 법이 제정되었으므로, 연맹을 중심으로 e스포츠 대회를 많이 열어 오프라인에서부터 장애인들의 현실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또 집행부 구성도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을 골고루 안배하고 장애인들이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경기 방법을 연구하여, 장애인들의 치료, 재활, 사회참여를 하게 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1인 3역의 임윤태
현재 법조인으로서,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장애인e스포츠 단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1인 3역을 하고 있는 임윤태는 나아가 서민의 친구가 되고 싶은 변호사, 따뜻함을 나누는 정치인,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는 임윤태를 희망한다.
그가 어떤 역할에 있든, 그에게는 항상 ‘인간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 것이다.
[정태화 월간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