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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 [휴먼 오딧세이] 아버지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출산장려운동본부 정송본부장

이신재 | 2022-10-0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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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 출산장려운동본부장


정송씨는
교육학박사다.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했고 미국 아메리카 대학원에서 모자라는 공부를 더 했다. 그런 그의 화두는 수십년째 가정이고 늘 하는 말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다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자신을 가꾸로 집안을 잘 꾸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붓으로 쓴 가화만사성 액자는 한때 수많은 집의 마루 벽 한가운데에 떡하니 걸려있었다. 정치를 하겠다는사람들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액자가 사라졌다. 집안 구조가 바뀐 탓이었지만 그 말 자체를 잘쓰지 않게 되었다. 가정이니 집안이니 하는 말들이 어딘지 모르게 꾀죄죄하고 촌스러운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정송박사에게 가정은 변함없는 명제이다.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엄청 고생했고 곤욕을 치루었다.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자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가정은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방향은 조금 바뀌었다. 시대에 흐름이고 그것이 현재 딱 맞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에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지금 다듬고 있는 화두이다. 바로 ‘결혼출산장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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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희망입니다

“남자는 힘듧니다. 아버지는 더욱 더 하죠.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무게를 잡던 시절은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권위는 없어졌고 의무만 남았습니다. 고단한 삶의 연속이지만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시대에 맞는 아버지 상이 필요했습니다.”

남자는 세 번만 운다고 했다. 태어날 때, 부모가 돌아갔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때다. 하지만 남자라고 울 일이 없겠는가마는 옛날에 그렇게 배웠다. 여자들은 ‘어릴 땐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 후엔 남편을 따르고 늙었을 땐 아들을 따른다’는 三從之道)를 탓했지만 남자의 인생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안방에서 헛 기침 한 번 하면 시끄럽던 집안이 조용해지고 눈 한 번 크게 뜨면 모두 입을 닫았다. 달리 말이 필요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빛났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아버지는 어느 순간 ‘찬밥’이 되었다. 아내는 돈 벌어오라고 직장으로 내몰고 자식들은 얼굴조차 보기 힘든 아버지늘 ‘소 닭보듯 멀리 했다. 삶은 터전은 어찌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지지리 궁상이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아버지 운동’이었다. 아버지의 위상을 살리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변화시키고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공부 시키고 어려움을 나누며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대로 그렇게 내버려두면 설 땅이 없는 아버지는 힘을 잃고 아버지가 힘을 잃으면 가정도 사회도 제 몫을 못한다고 생각했다.

1996년 쯤 12개 시민단체가 뜻을 모아 ‘아버지의 전화’를 개설했다. 사회가 변하면서 모든 분야가 변화를 함께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지만 ‘아버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반응은 생각 그 이상이었다.

처음 뜸하던 전화가 십여일이 지나자 하루 종일 울렸다. 새벽 2~3시에도 왔고 이른 아침, 늦은 밤 가리지 않았다. 아버지들의 고민이 그만큼 많고 시도 때도 없다는 증거였다.

어떤 이는 아내, 또 어떤 이는 사춘기 자식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세 번만 울어야 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첫 소리가 울음일 때도 많았다.

4개월여간 1천 6백 25건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 평균 50여통이고 한 번 통화가 되면 적어도 30분이었다. 3시간 여 동안 전화를 끊지 않고 이것저것 상담하고 억울함을 쏟아내는 아버지도 있었다.

‘회사 일에 쫓겨 다니다가 아내로부터 이혼장을 받았다.’

‘아내에게 가게를 내주었더니 바람을 피웠다.’

‘아들 과외공부 시킬 돈이 없으니 뇌물을 받아라’

‘회사의 과중한 일에 힘을 다뺏기고 보니 밤에 아내와의 일이 안된다.’

‘아들이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아내 편이다.’

사연 1위는 역시 아내였다. 성격 차이, 과소비, 폭언 등 아내와의 갈등이 20%대로 가장 많았다. 아내의 가출, 외도, 이혼 등이 뒤를 이어 부부 문제가 전체의 50%였다. 자녀와의 문제는 20%선이었다.

‘아버지의 전화’ 였지만 아내의 전화도 꽤 많았다. 4개월 동안 4백여건이나 되었다. 남편의 외도(25%), 폭행(12%), 성적 불만(11%), 시댁과의 갈등(10%), 남편의 무능(9%) 등이 아내들의 걱정이었다.

그러면서 정박사는 문제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그들 모두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다. 했다고 했지만 그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터뜨리는 싸움에 불과했다.

아버지라는 강자는 사라졌고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 세계는 자유롭게 훨훨 날고 있는데 여전히 강한 줄 아는 강성 아버지들이 일단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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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가화만사성을 위해선 ‘내가 먼저 변해야’ 했다. 그래야 치국평천하가 되는 것 이었다. 일단 내용을 알려야 했다. 상담 창구에 비친 아버지들의 어려움을 책 한권에 담았다.

‘아버지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였다.

출발은 1990년쯤 ‘좋은 아버지의 모임’이었다. 한국자녀교육상담소를 운영하던 중 아버지의 문제를 발견했다. 자녀 교육의 처음은 가정이었고 굳이 따지면 아버지가 책임자였다. 그러나 그곳에 아버지의 자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도맡았고 아버지는 겉돌았다.

조금씩 먹고 살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직장이 우선이었다. 숙명처럼 느끼며 살아온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싫어서였다. 새벽 별 보면서 출근했고 짙은 어둠 속에서 퇴근했다. 일요일이 따로 없었다.

집은 직장에서 ‘잠깐 다녀오는 잠자리’일 뿐이었다. 어린 아들, 딸을 볼 시간도 없었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잘 자라는 줄 알았다. 그렇게 10여년 청춘이 흘러가자 아이들은 이제 가까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시간이 났지만 어느 새 자란 아이들은 시간이 없었다. 머리가 큰 자식들은 습관이 되지 않은 탓인지 다가오지 않았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였다. 아버지들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줄 몰랐다.

그 역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였다. 아들에겐 공부를 강조하지 않았다. 고 2때 보니 44등을 하고 있었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도 대학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는 터였다. 머리를 맞댔다. 공부는 아들이 하는 거였지만 방법은 그가 알고 있었다.

아들은 1년 여 후 서울대에 들어갔다.

그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론만 밝은 교육학 박사가 아니었다. 좋은 아버지이고 친한 아버지였다. ‘44등이 서울대에 갔어요’는 그렇게 출간되었다.

좋은 아버지의 모임을 하고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는 등의 이야기로 정박사는 1995년 ‘좋은 아버지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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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박사는 ‘아버지 운동’을 업그레이드 했다. 10여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아버지는 아버지 그 자체로 존경받던 시절이 아니었고 좋은 아버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다. 느끼고 공부해야 비로소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2000년 쯤 ‘아버지도 공부합시다’며 외치고 다녔다. IMF로 아버지들의 어깨가 한없이 축 처졌지만 그런 아버지에 대해 이해하고 어루만지며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동 틀 때였다.

뜻밖으로 많은 기업과 사회단체들이 그들을 찾았다. 그는 자녀 교육을 위한 아버지의 역할, 부부화합을 위한 남편을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녔다.

‘좋은 아버지의 모임’이나 ‘아버지의 전화’는 굉장히 의미 있는 활동. 그러나 돈이 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수익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 아니니 당연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돈이 안 된다고 탓 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돈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 사회는 누구랄 것도 없이 아버지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기업들은 더 이상 애사심과 업무 개선 교육만 하지 않았다. 가정을 화목하게 이끄는 좋은 아버지가 회사 일도 열심히 하고 작업능률도 올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아버지 강의’를 했다. 서울, 부산을 하루에 오간 적도 있었고 아침, 점심, 저녁에 하기도 했다. 누구든 원하면 당연히 달려갈 일이었고 그래서 뛰어다녔는데 기업들은 강의를 하고 나면 강연료를 주었다. 처음엔 ‘뭐 이런 걸 다’했지만 받는 것이 맞았다.

기업체들의 강연료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특대우를 해주는 곳도 많았다. 모처럼 실생활과 직결되는 강의다운 강의를 받았다고 말해주는 게 더 고마웠지만 돈봉투도 나쁘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호황이었다. 한창때는 양복 주머니가 강의료 봉투로 불룩 튀어 나올 정도였다. 강의료의 일부는 다시 아버지 운동에 들어갔다. 그러고도 남았다. 그때 돈을 좀 모았어야 했다. 어느 세월이든 세세연년 호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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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산업도 미래를 위한 일

시민운동가 정송.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정의했다. 어느 날 한 지인이 사업한다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친환경산업은 아버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도울 일이 없겠느냐고 했다. 친환경적인 물건이고 더없이 좋은데 영세해서 뚫고 나갈 방법이 여의치 않다고 했다. 그의 기획력을 믿고 찾아온 것이었다.

둘러보니 그런 기업들이 꽤 됐다. 대나무로 타월을 만드는 업체, 친환경 소재로 시멘트를 대신 할 수 있다는 건축자재, 아토피를 없애주는 바닥재 등 마음먹고 찾아보니 꽤 이었다. 그들을 한데 묶어 영업을 같이 하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10여개 업체를 모아 ‘친환경사업단체’를 만들었다. 정박사는 그들을 홍보하고 편견을 불식시켜 납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었다. 단체장을 떠맡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영업 맨’이었다. 그는 그러나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며 직접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가 나서자 꿈쩍도 않던 벽이 조금씩 움직였다.

‘좋은 아버지 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라는 브랜드가 나름 먹혀들었다. 회원 단체가 조금 더 늘어났다. 가능성을 보며 찾아 온 사람들이었다. 아이템이 친환경이면 꼬치꼬치 따지지 않았다.

잘하면 돈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어느 새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의욕적으로 물건을 팔기위해 다녔다. 덕분에 2007년엔 친환경부문 대한민국 산업대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덕분’이 아니었다.

제법 움직였던 벽은 그러다 말았다. 모였던 업체들 중 일부는 빠져나갔다.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중 몇몇이 그를 팔고 다니며 해서는 안될일을 하고 다녔다. 더러는 정송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돈 장난을 쳤다. 돈이 흘러다니는 세상을 전혀 몰랐던 그는 속절없이 당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그는 사기꾼이 되어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소송을 걸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법이 그를 옥죄었다. 법정에서 보낸 수개월. 결국 정박사는 모든 혐의를 벗었다.

그는 억울하고 슬펐다. 돈이 되는 줄 알고 덤볐던 자신이 미웠고 함께 뜻을 모았던 사람들이 그를 속인 게 슬펐다.

정신 차릴 새 없이 자나간 회오리바람이었다. 정송은 다시 출발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냥 놔두면 나라가 없어질지도 모를 ‘애 낳기’에 깃대를 꼽았다.

애를 낳으려면 먼저 결혼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나라에서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고 지자체들이 나름 열심히 출산 장려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나아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방법을 바꿔야죠. 결혼을 해야 아이를 낳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출산율을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인구가 너무 많아 망하게 생겼다며 ‘셋도 많다’느니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자’고 난리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있는데 이젠 아이 많이 낳자고들 떠들고 있다. 기껏 60여년만의 변화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세상이다.

출산율을 높이는 일. 국가의 명제가 되었지만 나아진 건 하나도 없다.

1961년 92만여명이었던 신생아는 76년 75만여명, 2001년 57만 6천여명, 2019년 30만여명이 되었다가 지난 해는 마침내 30만명 미만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26만 5백명으로 데이빗 콜먼 옥스퍼드대 교수가 ‘인구 소멸국가 1회’로 지목할 만 하다. 그렇다면 국가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고 쓸데없는 곳에 예산을 낭비했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3백조원이 투입되었음에도 이 모양이다.

결혼출산장려, 그것이 정박사가 대안으로 내놓은 방법이다. 확실한 대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 보이기는 한다. 결혼은 출산의 선행 조건이고 그 뜻에 따라 ‘결혼출산장려 범국민운동’을 발족했다. 아직까지도 그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이니 ‘발족’이라는 포현은 너무 거창하지만 어쨌든 출발은 했다.

그는 왜 결혼을 문제 삼았는가. 원인 중 하나는 결혼비용. 남자 평균 5천4백만원, 여자 평균 4천7백만원의 비용 때문에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한다는 주장이다. 돈 때문에 결혼을 안하기 보다는 ‘하고 싶지 않은 마음’ 탓이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다문화가정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겐 도움이 될터이고 그들이 하는대로 이제는 거의 사라진 함잡이 공연, 전통혼례 공연을 화려하게 펼쳐 축제 분위기를 만들면 작은 붐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듯. 적어도 3백조를 투입했는데도 급속하게 줄어드는 정부의 출산율 높이기 보다는 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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춣산장려운동본부가 제안하는 ‘저출산 극복 대안 10계명’ 도 있다. 정박사가 정립한 나름대로의 이론으로 ‘혼인하지 않은 이들의 자녀 인정하기’,‘결혼이민자 비자 확대’등은 정책적으로도 가능하다. ‘독신 보다는 가족’, ‘가정의 소중함 교육’, ‘출산결혼장려 프로그램 방송, 보도’는 홍보책이고 ‘결혼비용 절감운동’, ‘결혼페스티벌’, ‘기업체 무료 결혼식 시행’, ‘국가, 기업체 출산기금 대폭 확대’는 행동이다.

정송박사의 ‘결혼출산장려 범국민운동본부’는 그동안 지자체와 함깨 관련 공연을 쭉 해왔다. 관심을 돋우기 위해 미녀 선발대회도 겸했다. 반응을 나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한 지자체도 있고 함팔이등의 공연이 열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경했다. 지난 5월에는 청와대 개방 한국전통혼례 축하공연을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에서 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금 카타르 원드컵에 맞춰 전통혼례 축하공연을 준비하고 있고 10월의 지방축제 곳곳에 함팔이 공연을 올릴 계획이다. 전통혼례를 위해선 전문 연기자까지 섭외 해놓았다. 엉뚱한 것 같지만 효과는 있을 것 같은 결혼출산장려 공연은 그래서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고 있다. 대부분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머리 공연이다.

이제 마음 편하게 결혼출산장려 운동을 펼치고 있는 정송 박사. 대한민국을 영원히 존재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곤 휴대용, 조립식 혼례용품들을 챙겨 또 어디론가 떠난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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