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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6] 고급 바에서 땅콩을 먹고 껍질을 바닥에 그냥 버릴 수 있다...낭만과 통제의 도시 싱가포르

김학수 편집국장 | 2022-11-07 11:16
싱가포르 최고의 레플스 호텔 롱바에서 즐기는 국민칵테일'싱가포르 슬링' 이미지 확대보기
싱가포르 최고의 레플스 호텔 롱바에서 즐기는 국민칵테일'싱가포르 슬링'


싱가포르는 예전의 싱가포르가 아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됐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로도 부족하다. ‘하늘과 땅이 새로이 열렸다’는 의미인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실감이 날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들렀던 싱가포르는 개발도상국이었지만 2022년 10월 가본 싱가포르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현대의 ‘바벨탑’처럼 바닷가에 우뚝 솟은 휘황찬란한 3개 타워 건물 마리나샌즈, 인공적으로 원시 열대 정글을 만든 가든스 바이 더 베이, 2018년 북한 김정은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한 것으로 유명한 센토사 섬 등은 싱가포르가 애지중지하며 최고의 관광지로 자랑할만도 했다.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경제편을 살펴보니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경제 허브로 나와 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S&P, Fitch와 Moody’s에서 모두 국가신용등급 최고등급을 받은 국가이다. 아시아 국가로서는 유일하며, 국가의 안정성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싱가폴의 1인당 평균 소득이 6만 달러 정도라니 3만 달러 정도하는 우리나라의 2배 이상 된다. 그만큼 국가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큰 아들이 대기업 주재원으로 올 초 발령받아 싱가포르에 정착한 뒤 초대를 받아 10월초 한글날 연휴를 이용해 3박5일간 싱가포르를 다녀왔다. 빌딩 숲으로 도배된 싱가포르 구석 구석을 돌아보며 신세계가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국 화교가 경제권을 쥐고, 말레이시아인, 인도인, 서양인 등이 두루 섞여 ‘인종 박물관’을 보는 것같은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싱가포르의 모습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레플스 호텔 2층에 자리한 '롱바'이미지 확대보기
레플스 호텔 2층에 자리한 '롱바'


그래도 과거의 숨결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레플스 호텔의 ‘더 롱바(The Long Bar)’가 그랬다. 최첨단 빌딩 도시에서 레플즈 호텔은 고풍스러운 건물로 고고하게 서 있었는데, 호텔 2층에 위치한 롱바는 그야말로 19세기 말 싱가포르가 영국 식민지 시대를 받던 시대를 재연해 놓은 듯 한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영국 식민지 시절인 1887년에 영국의 건축양식을 모방해 지어진 래플스 호텔은 전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19세기 호텔이다. 대공황 때는 문을 닫았고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점령기에는 일본식 료칸(旅館)이 되기도 했으며, 전쟁 포로를 위한 임시 수용소가 되기도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 호텔을 국가 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 호텔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찰리 채플린 등 유명인사들은 물론 ‘달과 6펜스’를 지은 윌리엄 서머싯 몸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대문호들도 투숙한 바 있다.

특히 레플스호텔의 롱바는 싱가포르 국민칵테일격인 ‘싱가포르 슬링(Singapore Sling)’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1915년 롱바의 바텐더였던 나이암 통 분(Ngiam Tong Boon)은 파인애플 주스와 라임 주스를 넣은 칵테일을 고안했다. 싱가포르 실링을 소개한 관광 책자에는 롱바의 바텐더의 말을 인용해 실었다. “당시만 해도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이 술을 마시는 것이 엄격한 때였죠. 그래서 여성들이 들고 있어도 자연스러운 비주얼의 칵테일을 만들게 됐어요. 물론 진을 살짝 넣어서요.” 싱가포르 슬링은 싱가포르의 노을을 닮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헤드 바텐더가 눈앞에서 만들어 준 한 잔의 싱가포르 슬링은 밑으로 갈수록 핑크 장밋빛으로 짙어졌다.

고전적인 롱바 내부 모습.이미지 확대보기
고전적인 롱바 내부 모습.


사실 칵테일보다는 내부 분위기가 더 특별하다. 19세기 초 식민지 시절로 돌아간 듯한 인테리어와 라이브 밴드의 감미로운 음악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롱바에서는 안주로 나오는 땅콩 껍질을 그냥 바닥에 버리는 게 전통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땅콩 껍질을 마구 버리며 청결 스트레스를 해소했을 모습을 생각하면 버릴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휴지를 함부로 버렸다가는 1000싱가포르달러(SGD)씩 벌금이 부과되지만 여기서 만큼은 땅콩 껍질을 바닥에 마구 버려도 되는 ‘자유’가 보장된다.

롱바 바닥에 먹고 버린 땅콩 껍질이 버려져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
롱바 바닥에 먹고 버린 땅콩 껍질이 버려져 있다.


1900년대 초반 처음 오픈할 때만 해도 롱바는 지금 같은 럭셔리 바가 아니었다. 철도가 발달하기 시작한 무렵, 말레이시아에서 정원사들은 주말에 싱가포르로 오곤 했고 롱바는 그들이 모여 술을 마시던 장소였다. 그때 그 바닥 그대로, 지금도 땅콩 껍질이 나뒹군다. “매번 청소하는 것도 일이겠구나”라고 큰 아들에게 말하자 그게 여기 전통이기 때문에 오히려 바안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롱바의 오픈 시간은 오전 11시다. 롱바를 찾아간 시간은 점심 시간이 지난 오후 2시쯤이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2층 문밖으로 유럽인, 아시아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만을 시켜도 땅콩은 무한정 서비스로 제공됐다.

아시아에서 금융과 물류 유통을 중심으로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싱가포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국가가 됐지만 과거 식민 역사에서 내려오던 전통을 이어가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어가는 것을 보면서 ‘문화가 곧 역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김학수 월간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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