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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6] “내 행복을 추구하는 내 삶의 과정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기 바란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 권영규 이사장

정태화 기자 | 2022-11-0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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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 기자] 그의 표정은 밝았고 대화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행복하다’고 했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산다’고 했다. 그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었다. 어려운 일이 닥칠때마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적극 도전했다. 도움을 주는 이웃과 동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공무원이었고 서울시 공무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980년 23회 행정고등고시로 공직에 입문해 31년 동안 서울시에서 재직했고 행정1부시장겸 시장권한대행으로 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사무총장으로 2년을 보냈고 국제협력단(KOICA) 소속 자문관으로 파라과이와 콜롬비아에서 3년, 그리고 다시 2년은 도시행정 전문위원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현재 서울에서 자원봉사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자원봉사가 퇴직 후에 꼭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국제교류 담당사무관으로, 2002년 월드컵 때는 서울시 월드컵추진단장으로, 그리고 문화(체육)국장과 국민생활체육회 사무총장으로서 각종 스포츠 행사를 치르면서 자원봉사자들과 신나고 즐겁게 어울려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봉사활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요즈음 또 다른 봉사활동을 생각한다고 했다. 다양한 스포츠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체육인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바로 서울시자원봉사센터 권영규 이사장(67)이다.
권영규는 경북 안동군 월곡면 정산동 등재마을에서 1954년 음력 2월 4일, 아버지 권상욱 씨(작고)와 어머니 김수의 씨(90) 사이에 3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산동은 안동 시내에서 50리, 면소재지인 미질까지는 10리, 이웃 면 소재지인 예안까지는 20리 길이 넘는 소위 말하는 ‘깡촌’이다.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월곡면 일부가 수몰됐고 남은 월곡면은 예안면으로 편입됐다. 이제는 월곡면이란 이름조차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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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즐기며 희망을 나눈 깡촌시절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만 해도 먹을 것이 귀했다. 모두가 영세해서 벼 보리 밀 농사를 지어도 입에 풀칠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과일과 생선은 제수로 마련해야 겨우 구경할 정도였으며 5~6월 춘궁기인 보릿고개가 되면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는 집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혼사가 있는 날은 동네 전체가 잔치로 떠들썩했다. 이웃집에서는 잔치에 쓰일 음식을 부조하면서 나눔의 정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어린 나이에도 몸과 마음으로 함께 느꼈다.
그는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큰 병치레를 했다. 한달 이상 앓으면서 인내와 끈기를 배웠고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소중함을 알았다. 그리고 부모님을 통해 삶을 배웠다. 부모님이 아들이 아픈 모습을 보고 “학교와 병원이 가까이 있는 곳에 살아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끼시며 그동안 살던 깡촌을 떠나 그래도 조금은 도회지인 안동으로 이사를 하는 계기가 됐다.

몰입과 끈기, 그리고 도전

등재마을을 한번도 떠나보지 못하고 살았던 12살의 권영규에게 안동은 신천지였다. 뚝방에서 바라 보는 시원한 낙동강은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호롱불만 접했던 시골에서 처음으로 보는 가로등 불빛과 입학식날 학교 브라스밴드가 연주하는 애국가와 교가는 얼마나 웅장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그에게 중학시절은 공부에 재미를 붙인 시간이었다. 첫 번째 중간고사에서 반에서 1등을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고 잘한다는 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에 재미가 붙고 학교가 좋아지니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아침 일곱시도 되기 전에 학교에 가서 가장 먼저 교실 문을 열었다. 주말에도 답답한 집에 머물기보다는 학교를 찾아 넓은 교실에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일이 생기면 미루지 않고 서둘러 준비하는 버릇은 이때부터 생겼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3년 동안 각종 특혜를 주겠다는 말에 그대로 경안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학교 행사에 틈만 있으면 대표로 나갔다. 안동시내 고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백일장을 할 때도 대표로 나갔고 대구에서 고전읽기 경시대회에도 대표로 나갔다. 그리고 각종 발표를 할 때도 대표로 나섰다.
이렇게 고교생활을 마친 그는 경북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유신으로 시위가 잦던 시절이었다. 대학 1학년을 고교시절처럼 교복을 입고 다녔던 그는 2학년부터는 대학 생활의 낭만에 푹 빠져버렸다. 강의 시간에 늦도록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대구의 향촌동에서 고구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즐겼다. 때로는 유신에 반대하는 시위대 틈에 끼여 시내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3학년이 돼서도 장래와 진로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했다. 이럴 때 남자 대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 입대다. 일종의 도피처로써의 군대 선택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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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병으로 입대해 군대생활을 하면서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외줄을 타고 계곡을 건너야 하는 유격훈련, 진흙이 온통 범벅이 된 바닥을 기어가는 낮은 포복, 방독면을 벗고 애국가를 부르며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는 화생방 훈련 등 그 어떤 것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불평과 비관을 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도 없다. 현실에 적응하고 남의 탓을 하거나 처지를 불평할 그런 시간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이때부터 군대생활도 결코 힘들지가 않았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난 뒤 할 일이 없었다. 대학 동기생들은 군에 갔거나 취직을 했다. 그리고 일부는 행정고시에 합격을 하기도 했다. 공부에 자신이 있던 터에 행정고시 공부를 했다. 대학 3학년 2학기까지 교련수업을 이수했던 덕분에 병역 단축혜택을 받아 1978년 4월 18일 상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곧바로 9월 1일 복학할 때까지 절에 들어가 고시 준비를 했다. 그리고 9월 10일 4과목을 치르는 행정고시 1차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6과목을 치르는 주관식 2차 시험은 전혀 준비를 하지 않아 이해에는 응시하지 않았고 바로 2차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졸업하기 전까지는 도시락 두 개를 싸서 대학 중앙도서관에서 문을 닫는 늦은 밤까지 매달렸고 1979년 9월 졸업을 한 뒤에는 한적한 절간 뒷방에서 혼자 책과 씨름했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행정고시를 친다고 지원도 해주지 않았고 복학생이라 동료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였다. 혼자서 공부에 몰입하면서 끈기로 버텼다. 생활을 극히 단순화시켜 밤낮으로 오직 시험준비에만 힘을 쏟았다. 시험 전날 혼자 서울로 올라와 낙원동 허름한 뒷골목 여관에서 방을 잡고 그동안 공부했던 내용들을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혹 2차 시험에 떨어질 것에 대비해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원서도 제출했다.
입학시험을 치고 나오는데 예정보다 빨리 행정고시 합격자 발표를 했다. 합격이었다. 이어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군에서 제대한 지 18개월만에 두가지 시험에 모두 합격했으니 정말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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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노애락이 점철된 31년의 공직생활

권영규는 사무관 수습이 끝나고 근무지를 배정할 때 서울특별시를 지원했다. 대학원에 다녀야 하기도 했지만 어느 특정 지역 국민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서울시가 앞으로의 개인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는 1981년 5월 수습을 마치고 첫 보직으로 받은 동대문구청 민방위과장을 시작으로 2011년 10월말 공직을 떠날 때까지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다.
1986년에는 2년 동안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행정환경대학원(SPEA)에서 MPA(공공문제 석사) 학위도 받았다. 1993년 사무관에서 13년만에 서기관으로 승진해서는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2년 한•일월드컵추진단장, 문화체육국장을 거쳐 2008년에는 경영기획실장, 행정1부시장을 거쳐 서울시장 권한대행까지 맡아 공직자로서는 최고 직위까지 올랐다.
이 동안 크고 작은 일들도 많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때는 얼키고 섥힌 뒤처리를 감당해야 했고 1995년에는 건설한 지 6년밖에 되지 않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들이 매몰되었을 때는 사고 현장에서 시신 발굴 상황을 정리하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1998년 물폭탄으로 지하철 7호선 11개역이 침수되었을 때는 며칠을 승차장에 쌓인 진흙 범벅과 씨름해야 했고 이해 서울시의 숙원사업으로 추진된 서울추모공원 조성 건립을 반대하는 시위 때는 시청 정문을 지켰다.
고건 시장 시절(1998년 7월 1일~2002년 6월 30일) 시장의 업무추진비 공개를 위한 실무 작업을 맡았을 때는 ‘혼자 살려고 다른 사람 다 죽인다’는 말을 들어야 했고 2006년 120 다산콜센터를 만들 때는 성과를 확신하지 못한 간부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며 2007년 동사무소 100개를 줄인다고 하자 일부 자치구의회와 직능단체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럴 때마다 그는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시하며 꾸준하게 설득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동사무소를 줄이는 경우 용도 폐기되는 동사무소 건물을 어린이집이나 노인시설과 같은 복지시설이나 작은 도서관, 청소년 독서실과 같은 문화시설로 리모델링해 활용하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반대하는 측을 설득해 관철시켰다.
보람찬 일도 많았다. 쓰레기 더미의 난지도를 세계에 내놓고 자랑하는 월드컵 공원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에 참여했고 정수장으로 사용했던 선유도를 신개념의 환경생태공원이자 물 공원으로 변모시키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무엇보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2000년부터 월드컵추진단장을 맡은 그는 D-365일, D-100일, D-1일 행사, 원구단 시민축제, 여의도-상암동 월드컵플라자 운영 등 수많은 행사들을 직접 추진했다. 2001년 11월 10일에 준공한 월드컵경기장 개장 행사에 이어 월드컵축구 개막을 앞두고 공사를 마친 월드컵공원을 활용해 월드컵 분위기를 조성하는 문화행사를 기획했다.
서울광장에서의 월드컵응원전은 그의 엉뚱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한국과 폴란드와의 경기날 광화문 앞에 10만여명의 인파가 운집하면서 시작된 거리응원 열기는 미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반미감정이 고조되면서 우려를 자아냈다. 경찰측은 고건 시장에게 응원인파를 분산시킬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고 이에 시장의 지시를 받은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시청앞 광장 개방이었다.
이렇게 시청앞 광장을 응원단에게 개방하고 나자 안전사고가 염려되었다. 경기시간 내내 그는 시청 옥상에 있었다. 시민들이 응원하는 모습을 맘 졸이며 지켜봤다. 그러나 질서정연한 모습과 경기가 끝난 뒤 차분히 빠져나가는 행렬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미전이 열린 날은 비까지 많이 내렸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열성적으로 응원한 시민들과 경기가 끝난 뒤 젖어버린 신문 따위를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모습을 정말 감동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이 때 보이지 않은 곳에서 열심히 일해 준 자원봉사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후일담이지만 공직을 떠난 뒤 파라과이와 콜롬비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지금의 서울특별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을 맡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도 그는 이명박 시장 시절 문화국장을 맡아 청계천 복원사업에 참여했으며 한겨울에 시청광장에 스케이트장을 개설했고 2005년 광복 60주년에는 시청 청사를 태극기 물결로 수놓아 서울시민들에게 태극기 사랑을 심어주었다. 이때 시청 중앙에 걸었던 제1호 대형 태극기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분양을 요청해와 그 곳으로 보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숲,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등 문화도시 설계자로 서울을 세계적 명소로 만드는데 힘을 보탰다.
그는 행정1부시장이던 2011년 8월 24일 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과 관련된 주민투표로 사퇴한 뒤 이해 10월 27일 박원순 시장이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취임할 때까지 2개월여 동안 서울시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에게 그 자리에서 인수인계를 마치고 바로 사퇴, 31년 동안의 정든 공직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낯선 땅에서 찾은 보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서울시청을 뒤로하고 바깥 세상에 나와 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갑작스레 퇴직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2012년부터 2년간은 국민생활체육회 사무총장(당시 회장 유정복)으로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등 생활체육 진흥에 전력을 쏟았다. 2014년 사무총장직을 뒤로 하고 새로운 일을 찾던 도중 우연히 KOICA에서 해외자문단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았다. 파라과이 정부에서 일할 인적자원개발 전문가를 선발한다고 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곧바로 지원했고 영어와 전문 능력 테스트를 거친 후 2015년 2월 말 아순시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라과이의 생활은 ‘인적자원개발 전문가’라는 거창한 이름처럼 멋있지 않았다. 허름한 월셋방에서 직접 밥해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외롭게 밤 시간을 보내야 했다. 노상 강도를 만날까 조마조마하며 길거리를 걸어야 했고, 소매치기를 걱정하며 버스를 타기도 했다. 더구나 그를 초청한 책임자가 바뀌면서 후임자는 “왜 초청했는지, 무슨 어떤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조차 몰랐다. 결국 직접 부딪치며 해결했다. 파라과이 역사와 문화, 경제와 사회, 그리고 공직 시스템에 관한 자료를 찾아서 읽었다. 정부의 장기발전계획과 각종 정책을 확인하고 실제 제대로 추진되고 있는지 모니터링을 했다. 장관을 찾아가고 직업훈련청장을 만나고 현장 직원들과 만나 어떤 문제를 고민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자 조금씩 파라과이의 현실이 보였다. 서울에서 준비해간 역량강화 사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파라과이 공직자들에게 필요한 자세와 서비스 정신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결론에 이르자 간부들을 설득해 가면서 역량 강화 과정을 운영했다. “파라과이! 너는 할 수 있어!(Paraguay, ¡sí, se puede!)”라는 슬로건 아래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 문제를 찾아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유도하고 지도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파라과이에서 1년을 더 보낸 뒤 서울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던 중 콜롬비아 보고타 시의 ‘사회적경제청(IPES)’에서 정책기획, 집행, 모니터링 및 피드백을 도와줄 전문가를 초청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다시 영어 시험과 전문 면접을 치르고 보고타로 갔다.
하지만 황당하기는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도착 첫날 상견례 자리에서 국제협력담당관이 “기관장을 비롯한 간부는 물론, 직원들 중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영어를 사용하지 말고 스페인어를 쓰자!”라고 제안을 했다. 용기를 내어 그렇게 하자고 약속했고, 그날부터 일상생활은 물론 간부회의 발표와 세미나, 강의, 각종 자문 활동을 모두 스페인어로 하게 되었다.
IPES는 정책을 다루는 기관이 아니라 길거리 노점상을 관리하고 공영 시장을 관리하는 집행 기관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 신문 기사를 뒤지고, 시의회 회의록을 확인하고, 시장 공약 사항과 감사 보고서를 찾아 읽었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이 기관의 혁신 계획을 수립했고 전체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발표를 했다. ‘한계를 뛰어넘어(¡Mas allá del límite!)’란 타이틀도 내걸었다.
그들은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을 알고 싶어했고, 대중교통시스템 개혁,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 등 서울시의 행정 혁신 사례를 배우고 싶어했다. 기적을 이뤄낸 대한민국과 서울의 저력을 부러워했고 지칠 줄 모르는 한국인들의 끈기와 근면성에 경의와 찬사를 보냈다. 이렇게 5년을 보내고 2019년 6월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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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남에게 도움을 주는 길을 찾아

지난해 그에게 몇 가지 일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그 중에서 명예직인 서울시자원봉사센터의 이사장직을 선택했다.
이제 그는 서울시에서 각종 문화 스포츠 관련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양한 경험을 살려 오는 12월에 실시될 서울특별시 체육회장 선거에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는 일, 그리고 그런 길이나 그런 일을 찾아 끊임없이 도전하고 몰입하고 싶어 한다. 서울특별시 체육회장도 바로 그런 일 가운데 하나다.

“나는 12살이 되어서야 전깃불이란 걸 처음 봤던 촌뜨기였지만 40년 후에는 세계적 대도시 서울의 최고 지위까지 올랐고, 50년 후에는 경험과 지식을 나누겠다고 세상을 누비고 다녔다.
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내 곁에는 늘 고마운 분들이 함께 했다. 정성을 다해 키워 주신 부모님, 사랑 넘치는 아내와 자녀들, 우애 깊은 형제자매들, 수시로 연락하고 안부를 묻는 친구들, 이웃들, 그리고 밤을 새우며 일했던 동료들!
이런 분들을 가진 나는 정말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덕분이다. 전쟁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갈등하고, 부대끼며 살면서도 정말 짧은 기간에 경제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낸 대한민국 덕분이다.”

-시민행복을 디자인하다, 권영규 저 중에서.

서울특별시 자원봉사센터 권영규 이사장은?
195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1979년 제23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2011년 행정1부시장 겸 시장권한 대행을 끝으로 31년을 서울시에서만 보냈다. 그동안 서울특별시 법무담당관, 예산1담당관, 총무과장, 행정과장을 거쳐 월드컵추진단장, 문화(체육)국장, 행정국장, 경영기획실장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다. 이후 국민생활체육회 사무총장, KOICA 자문관을 지냈고 현재 서울특별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 근정포장(1992), 홍조근정훈장(2002), 황조근정훈장(2012)을 수상했으다. 저서로는 31년 공직생활을 기록한 시민행복을 디자인하다’(2016), 파라과이와 콜롬비아에서의 활동 내용을 기록한 사랑해 파라과이’(2017)‘Más allá del Líimite’(한계를 뛰어넘어 스페인어·201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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