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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 김범수 카카오 센터장 지난 1년간 정보량 4만2,636건…"올 10월 최다 관심도 기록"

김학수 기자 | 2022-12-08 15:18
 스타트업캠퍼스 총장 취임식 및 비전 선포식에서 초대 총장으로 선임된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비전 및 운영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이미지 확대보기
스타트업캠퍼스 총장 취임식 및 비전 선포식에서 초대 총장으로 선임된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비전 및 운영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학수 기자

지난 10월15일 카카오 메신저 등 카카오 계열 모든 서비스가 먹통이 되면서 대한민국 전체는 큰 혼란에 빠졌다. 메신저 하나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국민들은 일제히 깜깜이가 됐다. 의사소통은 물론 카카오 메일로 로그인 하는 업비트 거래소도 로그인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는 IT 한국에서 미증유의 사건으로 기록될 카카오 먹통 사건 이후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 센터장은 마치 죄인이 된 기분으로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비스 장애 보상안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국회에도 불려가며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고 사고 원인과 대책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공적인 노출을 꺼리는 그로서는 카카오 창업자이자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들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김범수 창업자에게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다. 국민들을 위해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며 카카오톡을 2010년 ‘국민 메신저’로 세상에 내놓았다. 카카오톡은 한국에서 피처폰 시대의 막을 내리도록 만들었고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이끌어내면서 스마트폰 보급률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린 사실상의 1등 공신이 됐다. 신생 벤처기업이었던 카카오가 다음을 집어 삼키게 했으며 단순 국민 메신저 앱을 넘어 스마트폰 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카카오톡 보급의 영향은 단순히 카톡이나 단톡 같은 신조어를 만든 것에서 끝나지 않았고, 눈, 콜택시, 지도 및 내비, 대리운전, 간편결제, 인터넷 전문은행으로까지 확산됐다.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이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및 소관 감사대상기관에 대한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미지 확대보기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이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및 소관 감사대상기관에 대한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지만 이번 카카오 먹통사태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플랫폼이라고 하기엔 부실한 카카오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줬다. 국민 10명 중 9명이 이용하는 메신저를 운영하면서도 이중화 시스템과 위기대응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국민의 일상을 멈춰세웠다. 성장에만 급급해 대형 IT기업의 기본이자 책무를 등한시한 것이다.

카카오는 처음에는 무료 서비스라 게임 업체와의 연동에 주력해 수익을 냈지만, 이후 준비했던 유료 서비스들과 카카오뱅크 등 인터넷 은행 사업이 대대적으로 성과를 내면서 2019년, 자산총액 10조 이상의 대기업 기준을 만족하며 9년만에 명실상부한 대기업으로 발돋음했다.

올 초 미국 경제전문통신 ‘블룸버그’는 카카오 주가가 지난해 6월 최고점을 기록한 이후 48% 가까이 급락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김범수 창업자의 주식 재산 가치 역시 약 70억 달러(한화 약 8조 3825억 원)가 줄어들었다. 앞서 지난해 7월 말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제치고 한국 최고 부호에 오르며 국내 1위에 안착했다. 블룸버그 지수에 따르면 현재 그의 순자산은 80억 달러(한화 약 9조 5880억 원)에 달한다.

김범수 창업자는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IT 기업인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집안에서 2남 3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다섯 남매의 교육을 위해 무작정 서울로 이사왔다고 한다.

정작 부모님은 한번도 뭘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노는 것도 마음껏 놀고, 공부도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정육 도매업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작은 집을 장만하기도 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부도가 났고, 다섯 남매를 다 대학에 보낼 수는 없어서 결국 그 혼자만 대학에 가게 됐다. 그래서 재수를 할 때는 혈서까지 쓰면서 독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손가락을 베서 혈서를 쓰고 담배를 끊기 위해 낱개로 파는 담배 3개비를 사다 책상에 올려놓고 진짜 힘들 때만 피웠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상 금연에 성공했는지 1년 후에 2개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에 86학번으로 입학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학교를 다녔다. 힘들었던 재수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로 고스톱 포커 당구 바둑에 빠졌다. 그렇다고 학업을 놓았던 것은 아니어서 4년 안에 학사, 2년 안에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1992년 석사를 졸업한 후 전문연구요원으로 삼성 SDS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컴퓨터 언어를 본격적으로 담당했다. 그해 양식편집기 ‘폼 에디터’를 개발했고 1993년 호암미술관 소장품 화상 관리 시스템을 개발했다. 1996년에는 PC통신 유니텔을 개발해 유니텔 에뮬레이터 유니윈2.0, 유니윈98의 설계와 개발을 맡았다. 1998년 정식으로 연구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삼성SDS에서 평생 가는 동지들을 얻었다. 문태식 마음골프 대표, SDS 입사 선배이자 네이버컴과의 합병을 제의했던 김정호 전 NHN 글로벌 게임사업 총괄 등이 대표적이다.

1998년 9월 삼성SDS를 나온 그는 그해 연말인 1998년 11월 한게임을 창업했다. 2000년 한게임을 삼성SDS 동기 이해진의 네이버와 합병시키고 NHN 공동 대표가 된다. 2004년 NHN 단독대표를 거친 이후 해외사업을 총괄하는 대표를 맡는다. 그러다 2007년 8월 대표직을 내던지고 가족이 있던 미국으로 떠났다. 자녀들과 놀아주고 학교 데려다주면서 1년을 보냈다. 그는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다시 귀국해 음악에 빠지고, 책에 빠졌다.

그렇게 가족과 놀기를 3년,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가족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어 카카오톡이 탄생했다. 본인이 미국에 있을 때 마침 아이폰이 출시되는 것을 보며 PC에서 모바일 시대로 옮겨갈 것을 짐작, 한창 준비하던 프로젝트를 무산시키고 메신저 서비스를 출시했다. 카카오톡은 PC메신저 일색인 시장에서 ‘모바일 메신저’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무료 서비스와 그룹채팅의 강점을 내세운 카카오톡은 출시 1년 만에 1천만 명의 이용자를 모았다. 당시 카카오톡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이유는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동통신사의 문자 메신저는 글자수 제한이 있었던 건 둘째 치고 별도의 통신비를 지불했어야 했다. 카카오톡은 인터넷에 연결만 되면 글자 제한 없이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후에 출시한 이모티콘과 부가 기능들이 유명세에 불을 붙여 흥행을 이끌었다. 이것은 당시를 보면 매우 과감하고 급진적인 투자이고 사업이었다.

그는 카카오톡 초창기에 단 한푼의 수익도 없이 서버 투자로 매달 10억 원 이상씩 돈만 썼다. 다만 SDS와 한게임 등을 통해 인터넷 사업을 영위해온 그간 경험에서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돈이 된다는 신념만을 믿고 지속적으로 투자금을 쏟아부었다. 이후 중국에서 투자금을 지원받아 지속적으로 투자를 넓혔다. 그의 전략대로 인터넷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된다는 이야기는 정설이 됐다.

그는 사업 외에도 기부, 사회기여 등 소셜임팩트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졌다. 특히 사람에 투자하는데 관심이 많아 보이며 100명의 CEO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6년에 스타트업캠퍼스 초대총장으로 청년들이 직장이 아닌 업을 찾는걸 돕겠다고 했고 사회혁신가를 찾아 지원하는 아쇼카코리아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코로나19나 강원도 산불, 태풍 피해 복구 등 사건이 터질때마다 수십억원씩을 기부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카카오톡이 국민메신저로 자리를 잡을 무렵,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규모의 경제에서는 재벌이든, 언론이든, 포털이든 독점하고 줄 세우는 것이 꿈의 경지였다. 그런데 새로운 실험이 성공했다. 애플이 만든 생태계에서 35만개 앱이 활동하고 있다. 다 같이 먹고사는 구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카카오톡도 수혜를 입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젊은 친구들이 활개 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주는 거다”라고 말했다.

골목상권 침해, 쪼개기 상장, 수수료 횡포 등 카카오를 둘러싼 논란이 커질 때마다 자주 그의 기업 가치관을 보여주는 이 말은 많은 이들에게 자주 거론되곤 한다. 카카오가 국민 편익을 높이고 IT(정보기술)·창업생태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가 ‘제2의 카카오’를 꿈꾸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이 중에는 카카오에 회사를 매각하고 카카오에 합류하는 것을 목표로 창업에 나선 경우도 많다. 카카오의 M&A(인수·합병)에서 ‘적대적’이란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김범수 창업자가 카카오 먹통 사태를 계기로 카카오 그룹의 기업 방향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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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카카오 센터장에 대해서 빅데이터 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난 1년 중 올 10월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터앤리서치는 마니아타임즈 의뢰로 김범수 카카오 센터장에 대해 뉴스·커뮤니티·블로그·카페·유튜브·트위터·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 12개 채널을 대상으로 온라인 포스팅 수(정보량=관심도)에 대해 빅데이터 분석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분석 결과 지난해 11월부터 올 10월까지 온라인에 김범수 센터장 이름이 들어간 포스팅 수는 총 4만2천636건이었다.

월별로 보면 올 10월 가장 많은 1만4천648건을 기록했으며 정보량이 가장 적은 달은 바로 직전인 올 9월로, 958건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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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2천636건의 김범수 카카오 센터장 포스팅 중 긍정 포스팅 수는 1만122건으로 23.74%의 긍정률을 기록했으며 부정 포스팅 수는 1만7천463건, 부정률은 40.96%였다.

온라인 글 들중 유저가 자신의 프로필을 드러낼 수 있는 트위터·인스타그램·유튜브·페이스북·카카오스토리·블로그등 7개 채널에서의 같은 기간 여성 관심도와 MZ세대 관심도를 분석했다.

우선 자신을 남성 또는 여성이라고 밝힌 글에서 성별 비중을 살펴본 결과 남성이 354건, 여성이 99건을 올린 것으로 드러나, 김범수 센터장은 여성보다는 남성의 관심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자신의 나이를 밝힌 유저를 대상으로 연령별 포스팅 비중을 집계한 결과 연령이 드러난 포스팅 수는 총 74건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20대와 30대로 드러난 포스팅수는 총 49건으로, 타 연령 정보량 대비 MZ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66.2%%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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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 김범수 센터장에 관련해 검색되는 주요 연관 키워드로는 △투자 1만5천270건 △글로벌 1만4천969건 △미래 1만2천930 △성장 1만1천150건 △데이터센터 8천459건 등으로 조사됐다.

김범수 센터장이 지난 1년간 해외 투자, 미래 성장, 데이터센터 관련 사고 등에 큰 중점을 두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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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트업캠퍼스 총장 취임식 및 비전 선포식에서 초대 총장으로 선임된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비전 및 운영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이미지 확대보기
스타트업캠퍼스 총장 취임식 및 비전 선포식에서 초대 총장으로 선임된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비전 및 운영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10월15일 카카오 메신저 등 카카오 계열 모든 서비스가 먹통이 되면서 대한민국 전체는 큰 혼란에 빠졌다. 메신저 하나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국민들은 일제히 깜깜이가 됐다. 의사소통은 물론 카카오 메일로 로그인 하는 업비트 거래소도 로그인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는 IT 한국에서 미증유의 사건으로 기록될 카카오 먹통 사건 이후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 센터장은 마치 죄인이 된 기분으로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비스 장애 보상안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국회에도 불려가며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고 사고 원인과 대책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공적인 노출을 꺼리는 그로서는 카카오 창업자이자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들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김범수 창업자에게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다. 국민들을 위해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며 카카오톡을 2010년 ‘국민 메신저’로 세상에 내놓았다. 카카오톡은 한국에서 피처폰 시대의 막을 내리도록 만들었고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이끌어내면서 스마트폰 보급률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린 사실상의 1등 공신이 됐다. 신생 벤처기업이었던 카카오가 다음을 집어 삼키게 했으며 단순 국민 메신저 앱을 넘어 스마트폰 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카카오톡 보급의 영향은 단순히 카톡이나 단톡 같은 신조어를 만든 것에서 끝나지 않았고, 눈, 콜택시, 지도 및 내비, 대리운전, 간편결제, 인터넷 전문은행으로까지 확산됐다.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이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및 소관 감사대상기관에 대한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미지 확대보기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이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및 소관 감사대상기관에 대한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지만 이번 카카오 먹통사태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플랫폼이라고 하기엔 부실한 카카오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줬다. 국민 10명 중 9명이 이용하는 메신저를 운영하면서도 이중화 시스템과 위기대응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국민의 일상을 멈춰세웠다. 성장에만 급급해 대형 IT기업의 기본이자 책무를 등한시한 것이다.

카카오는 처음에는 무료 서비스라 게임 업체와의 연동에 주력해 수익을 냈지만, 이후 준비했던 유료 서비스들과 카카오뱅크 등 인터넷 은행 사업이 대대적으로 성과를 내면서 2019년, 자산총액 10조 이상의 대기업 기준을 만족하며 9년만에 명실상부한 대기업으로 발돋음했다.

올 초 미국 경제전문통신 ‘블룸버그’는 카카오 주가가 지난해 6월 최고점을 기록한 이후 48% 가까이 급락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김범수 창업자의 주식 재산 가치 역시 약 70억 달러(한화 약 8조 3825억 원)가 줄어들었다. 앞서 지난해 7월 말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제치고 한국 최고 부호에 오르며 국내 1위에 안착했다. 블룸버그 지수에 따르면 현재 그의 순자산은 80억 달러(한화 약 9조 5880억 원)에 달한다.

김범수 창업자는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IT 기업인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집안에서 2남 3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다섯 남매의 교육을 위해 무작정 서울로 이사왔다고 한다.

정작 부모님은 한번도 뭘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노는 것도 마음껏 놀고, 공부도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정육 도매업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작은 집을 장만하기도 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부도가 났고, 다섯 남매를 다 대학에 보낼 수는 없어서 결국 그 혼자만 대학에 가게 됐다. 그래서 재수를 할 때는 혈서까지 쓰면서 독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손가락을 베서 혈서를 쓰고 담배를 끊기 위해 낱개로 파는 담배 3개비를 사다 책상에 올려놓고 진짜 힘들 때만 피웠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상 금연에 성공했는지 1년 후에 2개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에 86학번으로 입학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학교를 다녔다. 힘들었던 재수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로 고스톱 포커 당구 바둑에 빠졌다. 그렇다고 학업을 놓았던 것은 아니어서 4년 안에 학사, 2년 안에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1992년 석사를 졸업한 후 전문연구요원으로 삼성 SDS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컴퓨터 언어를 본격적으로 담당했다. 그해 양식편집기 ‘폼 에디터’를 개발했고 1993년 호암미술관 소장품 화상 관리 시스템을 개발했다. 1996년에는 PC통신 유니텔을 개발해 유니텔 에뮬레이터 유니윈2.0, 유니윈98의 설계와 개발을 맡았다. 1998년 정식으로 연구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삼성SDS에서 평생 가는 동지들을 얻었다. 문태식 마음골프 대표, SDS 입사 선배이자 네이버컴과의 합병을 제의했던 김정호 전 NHN 글로벌 게임사업 총괄 등이 대표적이다.

1998년 9월 삼성SDS를 나온 그는 그해 연말인 1998년 11월 한게임을 창업했다. 2000년 한게임을 삼성SDS 동기 이해진의 네이버와 합병시키고 NHN 공동 대표가 된다. 2004년 NHN 단독대표를 거친 이후 해외사업을 총괄하는 대표를 맡는다. 그러다 2007년 8월 대표직을 내던지고 가족이 있던 미국으로 떠났다. 자녀들과 놀아주고 학교 데려다주면서 1년을 보냈다. 그는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다시 귀국해 음악에 빠지고, 책에 빠졌다.

그렇게 가족과 놀기를 3년,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가족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어 카카오톡이 탄생했다. 본인이 미국에 있을 때 마침 아이폰이 출시되는 것을 보며 PC에서 모바일 시대로 옮겨갈 것을 짐작, 한창 준비하던 프로젝트를 무산시키고 메신저 서비스를 출시했다. 카카오톡은 PC메신저 일색인 시장에서 ‘모바일 메신저’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무료 서비스와 그룹채팅의 강점을 내세운 카카오톡은 출시 1년 만에 1천만 명의 이용자를 모았다. 당시 카카오톡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이유는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동통신사의 문자 메신저는 글자수 제한이 있었던 건 둘째 치고 별도의 통신비를 지불했어야 했다. 카카오톡은 인터넷에 연결만 되면 글자 제한 없이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후에 출시한 이모티콘과 부가 기능들이 유명세에 불을 붙여 흥행을 이끌었다. 이것은 당시를 보면 매우 과감하고 급진적인 투자이고 사업이었다.

그는 카카오톡 초창기에 단 한푼의 수익도 없이 서버 투자로 매달 10억 원 이상씩 돈만 썼다. 다만 SDS와 한게임 등을 통해 인터넷 사업을 영위해온 그간 경험에서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돈이 된다는 신념만을 믿고 지속적으로 투자금을 쏟아부었다. 이후 중국에서 투자금을 지원받아 지속적으로 투자를 넓혔다. 그의 전략대로 인터넷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된다는 이야기는 정설이 됐다.

그는 사업 외에도 기부, 사회기여 등 소셜임팩트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졌다. 특히 사람에 투자하는데 관심이 많아 보이며 100명의 CEO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6년에 스타트업캠퍼스 초대총장으로 청년들이 직장이 아닌 업을 찾는걸 돕겠다고 했고 사회혁신가를 찾아 지원하는 아쇼카코리아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코로나19나 강원도 산불, 태풍 피해 복구 등 사건이 터질때마다 수십억원씩을 기부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카카오톡이 국민메신저로 자리를 잡을 무렵,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규모의 경제에서는 재벌이든, 언론이든, 포털이든 독점하고 줄 세우는 것이 꿈의 경지였다. 그런데 새로운 실험이 성공했다. 애플이 만든 생태계에서 35만개 앱이 활동하고 있다. 다 같이 먹고사는 구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카카오톡도 수혜를 입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젊은 친구들이 활개 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주는 거다”라고 말했다.

골목상권 침해, 쪼개기 상장, 수수료 횡포 등 카카오를 둘러싼 논란이 커질 때마다 자주 그의 기업 가치관을 보여주는 이 말은 많은 이들에게 자주 거론되곤 한다. 카카오가 국민 편익을 높이고 IT(정보기술)·창업생태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가 ‘제2의 카카오’를 꿈꾸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이 중에는 카카오에 회사를 매각하고 카카오에 합류하는 것을 목표로 창업에 나선 경우도 많다. 카카오의 M&A(인수·합병)에서 ‘적대적’이란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김범수 창업자가 카카오 먹통 사태를 계기로 카카오 그룹의 기업 방향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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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카카오 센터장에 대해서 빅데이터 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난 1년 중 올 10월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터앤리서치는 마니아타임즈 의뢰로 김범수 카카오 센터장에 대해 뉴스·커뮤니티·블로그·카페·유튜브·트위터·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 12개 채널을 대상으로 온라인 포스팅 수(정보량=관심도)에 대해 빅데이터 분석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분석 결과 지난해 11월부터 올 10월까지 온라인에 김범수 센터장 이름이 들어간 포스팅 수는 총 4만2천636건이었다.

월별로 보면 올 10월 가장 많은 1만4천648건을 기록했으며 정보량이 가장 적은 달은 바로 직전인 올 9월로, 958건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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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2천636건의 김범수 카카오 센터장 포스팅 중 긍정 포스팅 수는 1만122건으로 23.74%의 긍정률을 기록했으며 부정 포스팅 수는 1만7천463건, 부정률은 40.96%였다.

온라인 글 들중 유저가 자신의 프로필을 드러낼 수 있는 트위터·인스타그램·유튜브·페이스북·카카오스토리·블로그등 7개 채널에서의 같은 기간 여성 관심도와 MZ세대 관심도를 분석했다.

우선 자신을 남성 또는 여성이라고 밝힌 글에서 성별 비중을 살펴본 결과 남성이 354건, 여성이 99건을 올린 것으로 드러나, 김범수 센터장은 여성보다는 남성의 관심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자신의 나이를 밝힌 유저를 대상으로 연령별 포스팅 비중을 집계한 결과 연령이 드러난 포스팅 수는 총 74건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20대와 30대로 드러난 포스팅수는 총 49건으로, 타 연령 정보량 대비 MZ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66.2%%것으로 나타났다.

[VOL.7] 김범수 카카오 센터장 지난 1년간 정보량 4만2,636건…"올 10월 최다 관심도 기록"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1년간 김범수 센터장에 관련해 검색되는 주요 연관 키워드로는 △투자 1만5천270건 △글로벌 1만4천969건 △미래 1만2천930 △성장 1만1천150건 △데이터센터 8천459건 등으로 조사됐다.

김범수 센터장이 지난 1년간 해외 투자, 미래 성장, 데이터센터 관련 사고 등에 큰 중점을 두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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