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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 휴먼 오딧세이 - '유쾌한 민경삼'의 35년 우승 반지 6개 이야기

사진교체 등

이신재 | 2022-12-08 15:16
경쾌한 민경삼 선수, 유쾌한 민경삼대리

1994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잠실야구장 라커룸 복도에서 만난 민경삼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기분 좋은 인사를 했다. 그날은 사실 신나는 날이었다. 그의 LG가 인천연고의 태평양돌핀스와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 이미 선수가 아니었다.

1963년생 민경삼은 신일고, 고려대를 거쳐 1986년 1차지명 선수로 MBC 청룡(LG전신)에 입단했다. 그리고 MBC청룡이 LG트윈스로 옷을 막 갈아입은 1990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뛰었다.

민경삼은 내야수 선발오더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선발로 출전하지는 못했다. 1차전에선 대주자로 나선 후 타석에 까지 서서 2타점을 올렸다. 팀이 3회말 5점을 추가, 7-0으로 앞선 상황이어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서울연고팀의 한국시리즈 첫 승 멤버였다. 민경삼은 4차전에도 출전했다. 대주자로 시리즈 그림의 한 켠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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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시리즈가 아니라 평소에도 설 자리는 마땅찮았다. 김재박, 김상훈, 이광은에 김동재, 나웅 등이 버티고 있는 LG내야는 올스타라고 해도 손색 없을 정도였다. 수비나 주루 플레이만 따진다면 결코 뒤떨어지지 않지만 타격은 그저 그랬고 그래서 주전 경쟁에선 늘 밀렸다.

유격수 김재박, 3루수 이광은은 레전드. 민경삼이 아니라도 이길 선수가 거의 없었다.

1994년 그날은 그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였고 그는 31세 한창 때였다. 90년 ‘함께 우승’을 이끌었던 선배 김용수와 정삼흠, 김태원이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라운드에 있지 않았다. 잘나가는 선배에 밀려 올바른 주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93시즌을 끝내고 은퇴한 터였다.

선수생활이 너무 짧아 아쉬웠지만 민경삼은 선택을 해야 했다. 야구냐, 아니냐. 선수냐 아니면 다른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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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은 쉽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LG소속이니 별 차이 없을 듯 하지만 선수입장에서 보면 프런트로의 전환은 모험이었다. 성공 가능성도 크지 않은 터에 대접도 시원찮고 연봉 또한 엄청난 차이였다.

민경삼은 주전은 아니었지만 1차지명 출신이어서 적잖은 연봉을 받았다. 야구팀 내야수 민경삼과 LG구단 대리 민경삼의 연봉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3가지 악재. 그런데도 민경삼은 그 길에 들어섰다.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10년, 20년 뒤를 보았다. 주변에선 다른 소리를 했지만 그는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아쉬운 선수생활, 그러나 먼 훗날…

“그 때가 나의 야구 인생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정말 많은 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그는 그 이후 또 한 번 비슷한 기로에 섰지만 이미 오래 전 생각해 둔 터여서 뻔한 유혹을 뿌리치고 자기의 길을 걸었다.

‘유쾌한 민경삼’은 ‘명쾌한 민경삼’의 프런트 버전이었다. 그는 긍정의 아이콘이었고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밝은 분위기를 만들 줄 알았다. 그리고 지혜로운데다 무엇보다 공감능력을 타고 났기에 관리하고 설계하는 일이 딱 맞았다.

4년만의 한국시리즈. 선수가 아니었어도 민경삼은 즐거웠고 그래서 목소리도 커졌다. 프런트가 저리 밝으니 LG가 이번에도 우승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그 느낌대로 LG는 또 4-0, 완승을 거두며 우승했다.

선수로서 우승 한 번, 직원으로서 우승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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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삼은 프로 10년이 되지 않아 두개의 우승 반지와 인연을 맺었다. 평생 우승 한번 못해 본 관계자가 의외로 수두룩 한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민경삼은 잠시 ‘한 눈’을 판적이 있다. 본업의 연장이었지만 그의 긴 프런트 인생에서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1997년 천보성이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은 매니저로 괜히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민경삼에게 수비 코치를 맡겼다. 한 4년 후배들을 가르쳤다. 나름 소득도 있고 보람도 있었으나 계속 갈 일은 아닌 듯 했다.

감독따라 목이 오락가락하는 신세가 영 마뜩찮았다. 천감독이 아웃되면서 민경삼은 자신의 길을 다시 한 번 다졌다.

“어떤 게 한 눈 파는 것이었을까요? 코치 4년이면 충분하다 싶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프런트의 비중이 커지고 할 일이 많아질 때 였죠. 다시 구단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이었다. 잠시 뜸을 들였다. LG는 아니었다. 인천 팀 SK와이번스였다. 운영팀장, 경영지원팀장, 운영본부장 일을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게 무엇보다 좋았다. 경기는 선수들이 하고 승부는 야구장에서 벌어지지만 그곳까지 가는 앞뒷일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 선수에서 매니저, 코치까지 한 야구 만능 본부장이라 일을 잘 할 수 있었다. 효율성도 높은 편이어서 안팎에서 모두 좋아했다.

그땐 말없이 돌아섰지만 그 인연이 14년후 SSG서 만개

민경삼은 그때 추신수와 인연을 맺었다.

2007년 여러 명의 국내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돌아올 때였다. 각 구단들이 서로 잡으려고 하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했다. KBO는 한시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국내선수 지명권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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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삼은 메이저리거 특별지명 모임에 나갔다. 누구를 뽑느냐가 관건이었지만 먼저 뽑느냐 뒤에 뽑느냐가 더 중요했다. 민경삼은 1순위를 뽑았고 추신수를 선택했다.

먼 훗날의 이야기여서 그다지 중요하게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중 누구도 바로 돌아 올 선수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하면서 그는 당시 신영철사장과 추신수가 머물고 있던 클리브랜드 인디언스 트리플A로 날아갔다.

“결과요. 결과는 14년 후 였죠. 추신수와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어깨를 다쳐 정상 상태가 아니었죠. 경기 후 1시간 반 동안 재활 훈련을 한 후에야 나오더군요. 메이저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가득해서 함께 돌아가자는 말을 입끝에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를 보면서 이 선수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판단했고 같이 가자는 말 대신 ‘반드시 성공할 테니 걱정말라’는 말만 하고 돌아왔죠. 인연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인가 봅니다.”

그 먼 길를 가서 말 한마디 안하고 밥 먹고 격려만 하고 돌아왔다. 민경삼과 신영철의 비싼 헛발질이었지만 14년 후 그게 큰 도움이 되었다.

추신수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왜 왔는지 다 아는 일인데 가타부타 말 않는 것이 고마웠다. 잊지 않고 가끔 한 번씩 소식 전하는 게 반가웠다. 그리고 돌아가도 될 때쯤 정성 들여 말하고 섭섭잖게 대우해주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리 없었다.

SK사장에서 새 팀 SSG랜더스의 사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처음 한 일이 추신수를 데려오는 일이었다. 그가 추첨해서 뽑아 놓았고 아주 오랜 전 말을 섞었던 선수인데 새 팀의 구단주가 관심까지 쏟아서 다가가기가 한결 편하고 좋았다.

추신수 영입은 SSG의 인천 상륙을 빠르게 성공시킨 중요한 요소였다. 새 팀의 노력을 보면서 인천 팬들은 SSG에게 금방 마음의 문을 열었다. 2022 한국시리즈 우승 때 정용진 구단주가 밝힌 멘트도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개인상 수상자는 한 명도 없지만 1등상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구장을 가장 많이 찾아 준 팬 여러분’이라는 멘트. 그 출발점이 바로 추신수였고 결승점이 이듬 해 최고액에 1억원을 더 얹어 제시한 김광현이었다.

선수, 매니저, 부장, 본분장, 단장, 사장으로 각각 우승

선수, 매니저, 부장, 본부장, 단장, 사장으로 총 6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 현장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린 사람은 민경삼 외엔 아직 한 명도 없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듯 하다. 여섯 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데 민경삼의 우승 경험이 2022년으로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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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삼은 프로야구 선수에서 구단 사장이 된 최초의 인물이다. 야구인 출신으론 김응용이 있지만 그는 프로야구 선수 출신은 아니다. 감독 출신은 그가 처음이지만 선수 출신 처음은 민경삼이다.

그러다보니 싫든 좋든 많은 관심을 받았다. 좋을 땐 ‘선수출신이고 프런트에서 조직을 배운 사람이라서 역시 다르다’고 했다가 조금이라도 잘 못 한다 싶으면 ‘선수 출신인데 뒤늦게 프런트에서 어설프게 배워 기본이나 감각이 없다’고 후려쳤다.

“출신 때문에 그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이 틀어지면 두배, 세배 욕을 먹습니다. 야구를 알면서도 그럴 수 있느냐고 했다가 야구 밖에 몰라서 저런다는 이야기까지 하더군요. 같은 자리 같은 상황을 놓고도 정 반대의 말들을 하는 겁니다. 긴 세월, 더러 잘못도 하고 어쩌보다보니 좋은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야구 사랑’으로 시작했습니다.”

늘 한 곳을 향해 달려온 민경삼. SK시절 김성근 감독을 내쫒은 ‘나쁜 단장’으로 찍혀 애를 먹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다.

2011년 단장 2년차였다.

SK의 우승을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를 선언했다. 구단과의 문제때문이었지만 김성근의 사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김성근 역시 구단이 자신을 붙잡으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팬들도 ‘야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성근을 구단이 짜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이 김성근의 뜻대로 돌아가리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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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민경삼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김성근의 사퇴의사를 바로 받았다. 김성근의 문제를 알고있던 야구인들은 그럴줄 알았다는 반응이었지만 속 내용을 모르는 팬들은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민경삼은 단장이면서도 인기인이 되었다. 물론 나쁜 사람이었다. 배신자라는 소리도 들었고 토사구팽의 앞잡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민경삼은 모든 일이 다 가라앉은 훗 날에서야 평가를 받았으나 당시는 험악했다.

“김성근 감독님은 저의 은사십니다. 신일고 시절 김감독님을 통해 야구를 깨우쳤고 눈을 떴습니다. SK에 모실 때도 제가 앞장섰습니다. 야구에 관한한 따를 사람이 없음에도 그때까지 우승 한 번 못했습니다. 우승에 목마른 사람이어서 보필을 제대로 하면 뜻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고 모셨던 은사였기에 우승 감독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죠. 그런 제가 어떻게 감독님을 바로 짜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팀을 생각하고 인천야구를 생각하며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에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운이고 우연이라지만 때가 되면 그린 큰 그림

민경삼은 의외로 ‘큰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다. 자신은 우연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듯 하다.

그가 앞장서서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SSG의 초대감독 김원형도 언젠가 그가 그린 그림의 일부다. SK시절 김원형을 보면서 ‘언젠가 이 팀의 감독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당시로 보면 김원형보다 박경완이 앞선 상황임에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신기한데 공교롭게도 그와 김원형은 사장과 감독으로서 신생 SSG의 첫 우승을 일구었다.

2022년 우승의 장면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몇가지로 추리면 추신수, 김강민, 김광현으로 결론 내릴 수 있고 그들은 모두 민경삼의 큰 그림 속에 있었다.

추신수는 14년전의 우연이 이어졌다. 김강민은 2014년 단장 시절 인연을 이어 놓았다. 내부 FA였던 그를 꼭 붙들어 놨다. 2016년 팀을 떠나면서도 그의 자리를 빼앗지 않았다. 연봉에 비해 성적이 시원찮았지만 계약 했다. 그리고 사장이 되었을 때 마흔살인 그와 계약을 연장했다. 마지막은 김광현이었다. 메이저리그에 미련이 없지 않았던 그를 최고 대우로 합류시켰다. 150억원에 1억원을 더했다. 마지막 1억원이 150억원을 더욱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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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는 팀 분위기를 잡았다. 김광현은 시리즈 6차전 마지막 마운드에 서서 우승 공을 던졌다. 김강민은 5차전 9회 대타 쓰리런 역전 홈런을 쳤다. 한국시리즈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어 놓은 시리즈 최초의 대타 끝내기 홈런이고 최고령 홈런이었다. 5차전을 그대로 졌더라면 승부는 알 수 없었다. SSG가 끌려다니는 형편이어서 그대로 졌거나 이겨도 7차전이었다. 하지만 5차전 뒤집기가 6차전 마무리로 연결되었다.

출범 2년만에 거둔 SSG의 창단 첫 우승 현장에서 민경삼이 숨기지 않고 눈물을 흘린 이유였고 건장한 두 장년 추신수와 김강민이 함께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마구 쏟아낸 이유다.

달인? 야구는 늘 진심이었다

“큰 그림을 그리자고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부 다 우연이고 운이였죠. 그러나 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일을 하다보면 어떤 그림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때 장면이 나중에 나타날 때도 있었죠. 대부분 어쩌다였지만 저는 늘 진심이었습니다.”

2016년 12월, 정 들었던 SK 와이번스를 떠났다. 떠나야 할 때였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다. 트로이 힐만 감독을 영입, 팀의 2018년 우승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떠나면서 이제 야구는 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야구는 열심히 봤다. SK 와이번스는 속속들이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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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팀이 많이 망가졌다. 염경엽 감독이 시즌 중 옷을 벗었다. 구단주가 SK 협력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민경삼을 찾았다. 늘 팀을 쳐다보고 있던 민경삼이었다. 문제점부터 해법까지 막힘없이 나열했다.

금의환향, 구단주가 지체없이 결정했다. 단장에서 떠났던 민경삼은 3년 여 만에 사장이 되어 돌아갔다.

선수 출신 첫 사장, SK 비임원 출신 첫 사장, 프런트 출신 첫 사장이었다.

프로야구 밥 40여년. 선수, 코치, 매니저 등 작은 일에서 단장, 사장까지 큰 일까지 하지 않은 게 없다. 일반 용어로 말하자면 ‘달인’이다.

민경삼은 2022시즌 자신이 뽑은 감독과 마운드와 타자로 우승, 달인의 화룡정점을 찍었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지만 달인은 그것이 생활화되어야 더욱 가치가 있다. 그의 야구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그가 좋아하는 새 길도 활짝 열려있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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