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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 [마니아 갤러리] 윤영자, 이만익 전

이신재 | 2023-01-11 12:10
윤영자의 생명주의 조각, 그 모성적 근원

한국 현대조각의 기수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 윤영자(1924∼2016)는 여성이라는 조건을 뛰어 넘고자 한 초기 여성 모더니스트의 한 전형이다. 그는 당대 보편적인 조형어휘로 정착되어 간 모더니즘 조각의 형식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여 한국 현대조각의 리더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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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Rhythm 브론즈 75x27x51cm


윤영자가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엽이었다. 주로 토쿄 유학생들이 주도해 온 우리 미술의 현대화 과정이 이 시기에 이르자 순 한국산 미술가들에게 넘겨진다. 해방을 기점으로 신설된 미술대학들을 통해 배출된 소위 ‘전후 세대’가 6ㆍ25 전흔의 복구기였던 1950년대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가 창설된 1949년에 동 대학교에 입학한 윤영자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1950년대는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는 시기였으나 여성의 사회적 조건은 근대 이전 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미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정황에서 한 여성작가가 조각을 전공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데, 윤영자는 더하여 당대의 새로운 조형언어를 과감하고 진지하게 실험하였다.

성차별적 구조를 넘어서는 윤영자의 투철한 작가의식은 형식과 재료 뿐 아니라 작업의 양과 폭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업은 고전주의, 사실주의, 생명주의, 순수추상 등 다양한 양식과 석고, 시멘트, 브론즈, 스테인레스 스틸, 석재 등 각종 재료들을 아우르며 작품의 종류도 소품으로부터 거대한 기념물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룬다.
Love 브론즈 30x22x95cm 1988이미지 확대보기
Love 브론즈 30x22x95cm 1988


윤영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한 1955년경으로, 초기 작업은 고전주의에서 사실주의에 이르는 조각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것이었다.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인상>(1955)이나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키는 <하늘을 찌르는 사나이>(1956)가 그 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적인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단순화된 곡선형 매스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다림>(1959)이 그 예로, 이를 통해 그가 표면의 세부를 정리함으로써 내부로부터 용솟음치는 힘의 강도와 방향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인체나 생명체의 외관을 묘사하기보다 그 내부에 함축된 생명력을 표출하고자 한 ‘생명주의(biomorphism)’ 조각의 조류에 동화되어간 것이며, 1960년대 중엽부터는 완전한 추상조각 또한 실험하게 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헨리 무어나 장 아르프가 주도한 생명주의 조각은 동시대에 공존한 기하추상 조각과는 다른 경로로 조각의 추상화(抽象化)를 이끌었다. 기하추상 조각이 형태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을 통해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예라면 생명주의 조각은 주관적인 감정이입을 통해 형태를 변형시킴으로써 전통을 새로운 국면으로 계승한 예다. 무기물인 돌이나 흙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생명주의 원리는 조각가의 작업을 조물주의 창조에 비유하여 온 조각의 오랜 전통을 이끌어온 원리인데, 현대의 생명주의자들은 보다 축약된 양식으로 이를 구사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유기적 형태의 단순화와 변형을 통해 생명현상 그 자체를 시각화하고자 하였다.
律-Rhythm 대리석 75x27x51 1974이미지 확대보기
律-Rhythm 대리석 75x27x51 1974


한국의 현대조각가들은 기하추상 조각보다는 생명주의 조각에 더 이끌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각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명주의 예술관이 예술행위를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의 전통 예술관에 상응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윤영자 또한 실험기의 과감한 도전 이후 생명주의라는 자신의 길을 발견한 후부터는 여타 경향들에 휩쓸리지 않고 그 길을 고수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를 한국의 대표적인 생명주의 조각가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윤영자의 작업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대강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단순화된 윤곽선의 여체 또는 모자상, 알 같은 형상을 품고 있는 익명의 생명체, 그리고 율동적 움직임의 일루전을 내포한 추상형상 등인데, 이들은 결국 ‘모성’이라는 주제로 수렴된다. 그의 작업에는 여성으로서의 주체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윤영자의 작품은, 외견상 여타 생명주의 조각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또한 신체적인 차원에서 경험한 생명현상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또한 함축한다.

생명현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시각화하기 위해 윤영자가 기용한 형식은 ‘정과 동의 변증법’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세포가 분열하여 두 개의 개체로 정착되고 그것들이 또 다시 분열하여 또 다른 힘의 균형점에 이르는 것과 같은 탄생과 성장의 과정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힘과 그 힘을 구체화하는 정적인 물질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움직이는 힘은 정착할 물질을 요구하고 불활성의 물질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통해 되살아난다. 윤영자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조형언어로 옮겨 놓은 것이다. 꽉 찬 덩어리와 텅 빈 공간들, 수직적 견고함과 수평적 유동성, 매끄러운 윤곽선과 거친 표면, 전체 구성을 제어하는 탄탄한 구조와 그것을 뚫고 불거져 나오는 곡선형의 매스 등이 팽팽한 긴장의 절정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베르그송이 말한 ‘생의 약동(élan vital)’의 시각적 구현에 다름 아니다.

윤영자의 작업에서 이러한 생명의 에너지를 가시화하는 태도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재료에 충실하기(truth to material)’다. 타틀린같은 구축주의자(Constructivist)가 물질 그 자체의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외친 지극히 유물론적인 이 구호가 윤영자에게는 물질에 깃든 생명력을 찾아내는 길이 되었다. 윤영자는 각종 재료들을 그 물성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함축한 생명의 힘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곡선형의 매스에는 부드러운 대리석을, 즉흥적인 얼룩을 위해서는 브론즈의 부식된 색채를, 날카로운 윤곽처리를 위해서는 스테인레스 스틸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대리석의 결을 이용해서 볼륨감을 강조하거나 흐르는 율동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금속의 반사표면으로 형태가 공간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질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순간 살아 있는 생명체로 환생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예술적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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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Rhythm 대리석 50x30x120 1974


윤영자는 구체적 내러티브나 사회적 메시지보다 형태의 미학을 우선시해 온 탐미주의자이자 그런 신념을 일생 지켜온 전형적 모더니스트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초기 모더니스트 조각가 반열에 자리매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미술이 진공의 작업실이 아닌 공적 소통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활동임을 의식하고 그 제도 공간을 바로 잡고자 한 여성 미술인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교수를 합쳐 30여년을 미술 교육계에 봉직했고 퇴임 후에는 석주미술상을 제정하여 여성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예술의 사회적 조건을 이론적인 비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행착오로 열린 실천을 통해서 넘어서고자 한 몇 안 되는 미술인 중 하나다. ‘순수한’ 작업과 그 작업에 교차하는 ‘불순한’ 맥락들, 중성적인(실은 남성적인) 형식주의 모더니스트의 얼굴과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체감해 온 한 여성작가의 얼굴, 그 사이에 조각가 윤영자의 진정한 정체가 있다.

글: 윤난지 현대미술포럼 대표. 이화여대 교수(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윤영자 화백 프로필

■1924년~2016년 여성조각가 1호

1955 홍익대학교미술학부 조소과 졸업
2017 제31회 김세중조각상 특별상
국전 특선 4회 문교부장관상
1996 석주문화재단 이사장
1995 한국조각가협회 고문
1995 한국미술가협회 고문


한민족의 얼과 자화상을 가장 한국적으로 그리는 현대 화가‌ - 이만익

‌이만익은 한국적 정서라는 커다란 과제 아래 인위와 조작이 없는 청정을 그린 한국적 서양화의 대가이다. 작가는 좋은 그림은 개인의 소리가 아닌 사회의 소리여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림은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교감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한민족의 한과 꿈을 화면에 담고자 했고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자 노력해왔다. 가난의 고통이 느껴지는 청계천변의 판잣집들을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검은 하천과 비어 있는 어두운 판잣집은 사람들이 공존하기를 포기한 공간의 이미지를 풍기지만 당시 우리의 감성과 얼굴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족도. Oil on Canvas 116x80.3cm이미지 확대보기
가족도. Oil on Canvas 116x80.3cm


1950년대와 60년대는 주로 역대합실이나 아기를 등에 업은 노인, 생활에 지치고 고단한 청계천 일대의 풍경 등을 대상으로어둡고 탁한 색채로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1964년 3월부터 한성 중,고등학교에서 시작해서 서울예술고등학교까지의 10년 남짓 한 시간을미술교사직으로 있으면서 국전 3회 연속 특선을 했다.

이만익은 더 넓은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그의 예술적 욕망,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또 다른 처절한 싸움을 위해서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파리 체류 2년여 동안 표현주의적 냄새를 풍겼던 작품 세계에 변화가 일어난다.
무거움과 어두움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같은 전환은 주제에 있어서 뿐만아니라 브러쉬 스트로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 명암이 깃든 드로잉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대신 화면은 압도적으로 평면화되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선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고 보다 단순한 색면의 대비로 색의 기능과 상징성도 얻게 되었다.

보이는 일을 화폭에 옮기는 일에서 보이지 않는 사념을 만들어내는 그림으로의 전환 계기를 터득하게 되었다.

‌화가 이만익은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일출. Oil on Canvas. 160x300cm이미지 확대보기
일출. Oil on Canvas. 160x300cm


유학 기간 동안 그는 대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배우면서도 자기를 찾기 위해 그들을 열심히 지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지원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주제를 찾고자 했다. 한 개인의 자화상처럼 한민족, 한사회의 자화상을 찾고자 했다.

그의 주제는 우리들의 삶과 전설과 역사 등으로 한없이 확대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멀리서 자기와 우리의 역사를 찾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의 눈망울에 촉촉히 스며있는 내밀한 역사의 차원, 곧 화가로서 그는 통찰을 통해 고유한 감성의 전통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우리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전승된 감성을 형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프랑스 유학이후 아류는 절대 안된다는 독자성에 눈을 뜬 화가 이만익은 "한국 정서의 표현은 서양인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며
한국적인 모티브인 어머니, 가족, 역사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것을 자신의 화제로 삼고 작업을 진행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1978년 개인전에서 비로소 그만의 색깔을 갖춘 작품들을 내보일 수 있었다.

이처럼 빠르게 그림의 경향이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파리시절을 통해서 "만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그리는 그림" 속에 빠져있음을 깨닫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미술관에서 배우고 부수고 깨뜨리고 지우려는 인고의 과정을 통해서였다.
좋은 날(도원). Oil on Canvas. 112x324cm이미지 확대보기
좋은 날(도원). Oil on Canvas. 112x324cm


‌이만익의 그림은 우리역사의 삶에 깃들인 인물들으르 하나같이 관조하는 분위기다.
잔잔하게 미소띤 얼굴에는 기다림이나 그리움, 슬픔과기쁨이 엇살리고 기다림과 그리움의 연민 위에는 '충만한 침묵'이 초연히 머물고 있다.

그의 선은 굵고 힘찬 유기적인 곡선에다 색채는 원시적이면서도 미술적인 녹청 군청 산호색이 정제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선과 색은 표현적 차원이 아닌 상징적 의미이며 정교하게 계산된 필치와 '긍정적 시각'으로 선명한 회화효과를 추구해내고 있다.

삶을 찬미하는 마음에서 나온 장식성 또한 '정감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돈시킨 것'으로 이만익 화풍에서 중요한 예술적 특징이 되었다.
신단수도. Oil on Canvas. 85x182cm. 1991이미지 확대보기
신단수도. Oil on Canvas. 85x182cm. 1991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과 폐막식 전광판을 수놓았던 미술감독 이만익의 88올림픽 판화..
마스게임과 어우러진 그의 작품들은 독창적인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우리의 역사, 설화가 빚어낸 흥미로운 이야기, 전통과 현대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지구촌 세계인에게 증명해보였다.

‌한눈에 누구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본다면 작가로서 그보다 큰 기쁨은 없으리라.
작가라면 누구나 이렇게 되고 싶어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를 단단히 다진 뒤 뼈를 깍는 고통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여 한다.
고흐가 그랬고 피카소가 그랬다. 이만익도 마찬가지였다.

" 요즘 그림에서 인간은 조롱과 비하의 대상이 되어 버렸어요"
현대 미술은 사람을 놀라게만 할뿐. 사람을 위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휴머니즘은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외투라고 생각해요"

그는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 이만익 그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의 원천엔 가족이 있다.

‌이 화백은 "내 작품의 초점은 인생의 어려움을 감싸주는 '외투'와도 같은 휴머니즘의 실천에 맞춰져 있다"며
"속이 빈 통에서 나는 웃음 소리와 같은 울림의 세계"라고 강조했다.

‌ (‌MKCollection 엠케이컬렉션 이만익미술연구소에서 발췌)

이만익 화백 프로필

이만익 (李滿益, 1938년 1월 21일 ~ 2012년 8월 9일)

황해도 해주 출생
1961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73-1974 프랑스 아카데미 괴쯔 (Goetz) 연수
1988 제24회 서울 올림픽 미술감독
제8회 서울 장애인 올림픽 미술감독
1993 제5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

■ 전시기간 : 2022. 9. 1 - 현재

■ 전시장소 : 한국미술진흥원 부설 카파미술관

카파미술관
카파미술관(관장 김순옥)은 한국미술진흥원 부설 오프라인 전시공간으로 1, 2, 3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올 8월 개관기념전(유작 상설전)을 시작으로 이만익, 윤영자, 구승희, 이희돈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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