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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9] [박주현의 산행 수필] 지리산...아~ 첫 눈

김학수 편집국장 | 2023-02-09 11:49
지리산 천왕봉에 선 필자이미지 확대보기
지리산 천왕봉에 선 필자
지리산 천왕봉 등 고지대에 올해 첫 눈이 내렸다. 하늘이 모지리에게 내리는 선물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배낭을 꾸린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시인)

행여 지리산(智異山)에 오시려거든/
천왕봉(天王峰) 일출(日出)을 보러 오시라
삼대(三代) 째 내리 적선(積善) 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老姑壇) 푸른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黑心)을 품지 않는/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般若峰)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女人)의 둔부(臀部)를 스치는 유장(悠長) 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 단풍(丹楓)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絶頂)으로 오시라

불일폭포(佛日瀑布)의 물방아를 맞으려면/
벌(罰)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碧霄嶺)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悔恨)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智異山)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철쭉 꽃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革命)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最後)의 처녀림(處女林) 칠선계곡(七仙溪谷)에는/
아무 죄(罪)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眞實)로 지리산(智異山)에 오시려거든/
섬진강(蟾津江)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白沙場)의 모래 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謙虛) 하게 오시라

연하봉(煙霞峰)의 벼랑과 고사목(枯死木)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自殺)을 꿈꾸는 이만 반성(反省) 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智異山)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變德)스럽지만/
지리산(智異山)은 변(變) 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 시는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에서 거처를 옮겨 다니며 살고 있는, 환경운동가 지리산인 이원규(1962~) 시인이 쓴 시로 지리 10경을 더듬으며 지리산을 노래한 시이다. 지리산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시로 등산인 등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작자는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에서 살며 지리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지리산의 주인이고 지킴이다. 때문에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기본 예의를 갖추고 오라고 간곡히 주문한다. 그래도 부탁한 주의 사항을 지킬 수 없어도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말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지리산을 더럽히는 것을 지리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주인의 입장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니까.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시인)"만큼 지리산을 더 잘 표현한 것은 없다.

 지리산 상고대와 운해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미지 확대보기
지리산 상고대와 운해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리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설레게 하는 산. 첫사랑에 빠진 처녀의 산뜻함이 배어 있는 산!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산! 우리 민족의 정기와 설움, 한(恨)을 송두리째 품고 있는 산! 지리산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으랴? 감히 그 누가 지리산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6개월 동안 가슴앓이를 하다가 , 아름다운 이를 만나러 간다. 지리산, 그리운 지리산. 장엄함으로 친다면 남한에서 그를 따를 곳이 있을까. 첫눈에 쌓인 자리산 6개월 만의 재회다. 그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진중함을 지닌 채로, 모든 존재를 품에 안아 줄 듯한 넉넉한 가슴까지. 아마도 나는 이만한 애인을 쉽게 찾지는 못하리라. 산 같은 사람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산의 마음, 변함 없는 그 마음이. 작은 이익에도 쉽게 부서지고,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는 마음들을 보며, 산처럼 든든할 수 있기를 바랬다. 자신을 바로 세우기 어려운 세상살이 속, 산의 굳건한 어깨를 바라볼 때면 항상 깊고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계약직! 갖가지 설움의 복잡한 날들의 연속인 지난 3개월 간에는 정말 어디론가 탈출하고픈 마음 뿐이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주친 걸작의 지리산 사진들은 내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 그곳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지리산 종주를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잊고 미소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반야봉에선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며, 삼도봉에선 구름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마냥 바라볼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리움으로 며칠을 보내고는 도저히 떠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20cm 이상 눈 내린 지리산에 '무박 혼산'은 위험하다고 옆지기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다른 산이 아닌 꼭 지리산에 가고 싶었다. 그곳이라야지 내 마음을 달래줄 것 같았기에. 짐을 챙기면서도 마음은 벌써 지리산 어느 모퉁이에 가 있었다. 대체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설레 보기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그 설레고 들뜬 내 모습에 또 한번 놀랐다. 설악의 수려함도, 신선이 나올 것만 같은 월출산의 맛도 일품이지만, 내게 있어 최고의 장소는 지리산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 청춘에 라면으로 8끼를 먹으면서도 지리산 종주의 환희에 젖어던, 그 아련한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벽 3시 50분. 백무동을 들머리로 하여 한신계곡, 세석평전, 연하선경, 장터목, 제석봉, 천왕봉 알현하고 다시 장터목으로 내려와 증산리로 날머리하는 11시간 하늘의 선물인 설국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는다. 백무동에서 하차한 대부분 산객은 장터목으로 향한다. 한밤에 무당이 접신하러 한신계곡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모지리는 이상한 기운에 빨려들어간다. 홀로 어둠이 사위를 적시고 있어 칠흑같은 어두운 밤에서 오는 두려움이 간혹 엄습하기도 한다.

흐릿한 랜턴 불 하나에 의지하며 걷는다. 다랑논! 첩첩이 겹쳐진 지리 연봉들이 마치 폭 좁은 천수답 다랑논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다. 다랑논의 계단을 딛듯 임천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곧 한신계곡으로 이어진다.

첫나들이 폭포까지는 대략 20분 남짓. 콰르르르 천둥 같은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을 걷는다. 길은 순하기 짝이 없다. 거친 곳도, 급한 오르막도 없으니 어지간해서는 숨이 찰 일도 없다. 한신계곡의 진면목은 첫나들이 폭포부터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굽이치는 서늘한 계곡을 바짝 끼고 오르는 길이다. 계곡의 이쪽저쪽을 출렁다리로 건너며 산길을 오르다보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폭포와 함께 소(沼)와 담(潭)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러나 상상만 하며 오르니 더 기막힌 풍광을 그려낸다. 한신계곡에서 가장 웅장하게 쏟아지는 폭포가 바로 가내소폭포다. 어찌나 폭포의 물줄기가 힘차던지 '쏟아진다'는 표현보다는 '뿜어낸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다. 폭포의 상단이 물길을 바짝 조이면서 폭포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포물선을 그려낸다. 폭포를 마주보고 서면 폭포의 물이 대기를 밀어내며 만들어내는 바람과 안개처럼 비산(飛散)하는 물방울이 차갑게 피부에 닿아 오슬오슬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다. 창조는 상상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지리산 고사목에 핀 눈꽃.이미지 확대보기
지리산 고사목에 핀 눈꽃.


고사목, 그의 몸을 숱하게 스치고 갔을 봄비와 여름 폭풍과 가을볕과 겨울 눈보라를 떠올린다. 세월의 침탈 끝에 다 잘려나가고 이제 몸통만 남은 그에게 말을 건다. "죽어서도 아름다운 건 아마 너 뿐일 거야." 드디어 촛대봉에 닿았다. 세석평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첫눈으로 지리산의 겨울을 시작하고 있는 눈 덮인 세석평전을 굽어보자니, 이곳에 철쭉이 만발했던 지난 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촛대봉에서 영신봉에 이르는 세석평전, 이 높은 고지에 이런 평원이 있을 줄이야. 덕유평전과 함께 1500m 이상의 고지대에 이처럼 아름답고 넉넉한 평원이 우리로 하여금 지리산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습지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특이하지 않은가?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이 평원에서 빨치산 투쟁대회를 열었다고 하니 그로부터 70년의 세월이 흐른 작금의 한반도 정세를 본다면 그가 뭐라고 할까?

세석평전에서 장터목까지 능선을 따라 걷는 3.4km의 아름다운 길. 1703m의 연하봉과 촛대봉을 거쳐가게 되는 이 길은 "연하선경"이라 하여 지리십경 중의 하나이다.

노고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낙조, 벽소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 이 열 가지를 지리십경으로 꼽는다. 산에 해 뜨고, 해가 지고, 달이 솟고,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잎이 붉게 물들고, 산맥을 휘감는 구름과 쏟아지는 폭포수, 강에 비친 푸른 산 그림자까지. 이 모든 아름다움이 여기, 이 산과 함께 있어 행복하다.

각오를 새로 하고 너무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연하선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기쁘다. 이제나저제나 이 길을 연모했는데 6개월이나 지나고 지리산을 찾다니, 그동안 지리산을 사랑하지 않은 나 자신을 책망하며 미안한 마음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아 다시 고개를 돌려 세석평전을 뒤돌아보고, 산행을 시작했던 백무동, 한신계곡 방향으로 눈길도 주고, 몸 컨디션이 안좋았던 때는 탈출로로 애용했던 거림 방향으로는 그윽한 향수에 젖은 눈빛을 보내면서, 발걸음과 마음은 장터목으로 향한다.

아! 연하선경. 25.5㎞의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길이 연하선경이라는데 이제야 이 아름다움을 알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다. 등산로엔 하늘의 선물인 첫눈이 바위와 구상나무에 지천으로 덮여있어 설국의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흥준 선생께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 쓴 글귀인데 조선조 정조시대에 유한준 선생의 글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멋진 글인가?

지리산을 사랑하면 알려고 하고 알면 보인다. 지리산의 멋진 아름다움과 그윽함, 장쾌함, 포근함, 풍부함 등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내포한 지리산을.

1990년대 <남부군>과 <태백산맥>을 읽고 지리산 등반에 나섰을 때 그 이전의 지리산과 달랐듯이, 명퇴하고 계약직으로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며 애환(哀歡)을 느껴서 그런지 지리산에 더욱 애착을 가졌더니 정말로 지리산을 사랑하게 된 것을.

사랑에 빠지면 그윽하게 바라보듯이 지리산을 걸으면서 가슴 저편에서 그윽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인일일까? 아니 당연할 것이다. 이 또한 지리산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닐까?

눈덮인 나무가지 사이로 장터목 산장이 바라보인다. 거의 다 왔다.

 지리산 천왕봉 오르는 길.이미지 확대보기
지리산 천왕봉 오르는 길.


장터목 산장에 도착했다. 1808m,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피소. 옛날 '산청군 사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물물교환과 물건을 사고팔던 곳'에서 유래가 된 곳이다. 그 옛날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와서 물물교환을 하고 물건을 사고 팔고 했을까. 참 놀랍다.

산은 이미 겨울이라 쉴새없이 찬바람이 몰아쳤지만, 간혹간혹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로 구름이 뭉게뭉게 떠있고 그아래 겹겹이 펼쳐지는 산자락은 역시나 지리산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름답다. 겨울을 앞두고 옷을 벗은 산은 그 몸의 선과 근육 하나하나까지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구비구비 섬진강 줄기가 내려다 보이며, 푸르게 푸르게 펼쳐진 산들의 끝은 하늘이다. 초겨울의 산은 그 몸의 근육과 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오월에 만났던 지리산을 다시 보니 그 감회가 새롭고 또 다른 표정으로 우릴 반긴다. 아침 식사시간이라 대피소에선 코펠 위에 찌개가 끓고, 라면을 끓이는 열기로 초저녁의 차가운 공기 속에 퍼져 나갔다.

물 한 잔 마시고, 운무 속에 천왕봉을 향해 걷는다. 5분 쯤 걸었을까, 하늘이 간혹 열리면서 산의 능선과 운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를 황홀하게 하는 그림,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천왕봉 정상에 서서 물결치는 산들을 상상하노라면 언제나 가슴이 떨린다. 동서남북, 구름과 산맥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내 가슴 속 가장 힘차게 출렁이는 물결, 지리산. 그 넘실대는 파도 끝에서 하늘도 조금씩 열어준다.

제석봉 가는 길목엔 구름의 걷힌 틈새로 한 줄기 서광이 강렬하게 비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짙은 구름 다시 몰려와 푸른 하늘의 모습은 다시 감춰진다. 그러나 하늘이 열리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이 순간, 내 마음은 가슴 속 구름을 걷어내고 눈부신 푸른 하늘을 본다.

연하선경으로부터 장터목산장을 거쳐 천왕봉까지의 구간은 가장 지리산다운 멋진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다. 오르내림만 없다면 신선놀음을 하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구상나무와 고사목들이 즐비한 곳. 그곳을 향해 올라간다.

오늘 등산로 주변에 구상나무와 고사목들이 어우러진 제석봉 부근 길은 그야말로 설국 화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제석봉을 지나는 길에는 강풍에 몸이 날려갈 것만 같았다. 제석봉을 지키고 있는 고사목들, 한때는 대낮에도 어두울 만큼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는 이곳이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지른 산불로 이렇게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산꼭대기까지 찾아든 인간의 오만의 자국에 씁쓸해진다. 그러나 제석봉은 그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상처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요즘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산림 복원 노력으로 구상나무 숲으로 거듭나고 있다.

천왕봉에 점차 다가서면 ‘통천문(通天門)’이라는 바위 굴이 나온다. “사람도 지나면 신선이 되고 신선도 이곳을 지나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곳이다. 아~모지리도 신선이 될까?

오늘 천왕봉으로 오르는 긴 행렬의 산객들은 최고의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사방엔 흰 눈, 하늘엔 흰 구름, 간혹 시리도록 푸른 구름바다가 천왕봉 아래로 깔려있다. 짙게 깔린 운무는 모든 산을 뒤덮어 보이지 않는다. 층층이 두껍게 깔린 아침 운무는 우리가 서 있는 천왕봉 아래 넓게, 멀리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운무는 멈추지 않고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이동할 때마다 다른 그림을 그린다. 가볍지만 엄숙하고 고요한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구름바다이던가. 눈 덮인 평야던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이 경이로운 풍경에 그저 할 말을 잃고 가던 길을 멈춰 선다.

 지리산 고지에서 바라본 설경.이미지 확대보기
지리산 고지에서 바라본 설경.


오전 10시 30분 경에 드디어 1915m 천왕봉 정상에 닿았다.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하다"라는 비석의 글귀를 지나서 눈 앞에 열린 광경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흘러가는 산들의 행렬, 놀랍게도 산맥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보인다. 남해다. 많은 산객들은 설마 저게 바다일까 긴가민가하지만 하늘과 같은 색으로 빛나는 그것은 분명 바다다.

지리산에서 보는 남해는 진한 감동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곳이 남한 최고봉임을 다시금 실감하며, 내 눈은 발 아래 세상, 시야가 허락하는 끝까지 달려간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을, 내려가서 모지리는 계약직으로 또 얼마나 싸워야 하는 것인지?

주말엔 지리산 천왕봉을 찾은 등산객들이 너무 많아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천왕봉에서의 즐거운 시간도 마감해야 할 듯. 천왕봉에서 지리산 서북능선과 덕유산 자락을 바라보지만 뵈는 건 오직 흐릿함뿐. 아쉽다.

예전엔 천왕봉 정상에 표석을 박을 수 있을 만큼 흙이 많았다. 지금은 주위가 온통 메마른 바위 뿐이다. 1967년 우리 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하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서 그렇게 되었다. 비로 씻겨가는 흙보다 사람들의 발밑에 묻혀가는 흙이 더 많을 정도라고.

천왕봉을 내려와 제석봉을 지날 때 한 차례 하늘이 다시 열린다. 장터목에 돌아왔을 때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빛난다. 변화무쌍한 날씨는 산행의 또다른 즐거움.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리산을 잊어본 적이 없건만 다시 찾아오는데 6개월이 걸리다니 그동안 난 뭘 갈구하며 살았던가?

큰 산은 하산길도 만만치 않다. 증산리로 하산하는 막바지. 지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노라니 '아직 멀었나'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온다. 그러자 마침 올라오던 대피소 직원분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오고 싶을 텐데요"라며 인사한다. 그래, 돌아가자마자 금세 보고 싶어지겠지. 그리워 몸살을 앓겠지. 대체 이 산의 무엇에 매료된 걸까. 단 한 차례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법이 없이, 구름과 바람과 빛과 시간과 함께 흐르는 산. 볼 때마다 새롭고 변화무쌍한 산. 한없이 깊고 넓은 그 품 안에 수많은 숲과 나무와 생령들을 담고 있는 산.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전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은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고, 그래서 사람을 홀린다. 미치게 한다.

내려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산, 언제나 의연한, 겸손한, 포용력 강한 너. 나도 너처럼 이 땅에 뿌리내리고 싶구나. 그렇게 당당하게 서고 싶구나. 지난 날에 나는 바람이고 싶었는데. 덧없는 세상, 누구에게도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 그러나 이제 나는 산처럼 살고 싶다. 그만큼 깊게, 그만큼 넓게, 한결 같이, 든든하게. 그 소망이 내게 과분하다고 한다면, 들판에 피어나는 풀꽃이 되고 싶다. 짧은 시간이지만 땅과 만나고 하늘과 만나고,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해 온 마음으로 피었다 지는 풀꽃. 그렇게 머물렀다가 떠나고 싶다.

이미 지리산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산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 "변함없이 그곳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고맙다고. 너는 언제까지나 지난 세월의 수많은 아픔과 추억과 희망을 고스란히 담고 그곳을 지키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언제고 다시 네게로 달려가 쉴 수 있겠지. 그때도 너는 한결 같은 모습으로, 세상 그 누구보다 넓은 가슴으로 나를 맞아주겠지. 안녕, 또 만나자."

[박주현 프로필]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 ROTC 27기. 하나은행 등 금융권 근무

[김학수 월간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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