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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9] [김학수의 사람 '人'] 육사 총동문회장을 맡은 '영원한 군인' 박종선 예비역 장군 "육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

김학수 편집국장 | 2023-02-09 11:53
육사 총동문회 신임 회장 취임식에서 박종선 예비역 중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육사 총동문회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육사 총동문회 신임 회장 취임식에서 박종선 예비역 중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육사 총동문회 제공]
일본 전국시대 말,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3대 무장들을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의 반응으로 비유해 성격을 대비시킨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다혈질이고 성격이 급한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릴 것이다”고 했고, 꾀가 많은 ‘원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으면 어떻게든 울려보겠다“고 했다. 느긋하고 신중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인내와 절제심을 보였다. 성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만큼이나 이들의 삶은 매우 달랐다.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통일을 목전에 두고 혼노지의 변으로 부하에게 살해당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통일을 이루고 천수를 누리며 죽을 때까지 최고 권력자였으나 후계구도 과정에 문제가 많아 아들 대에서 가문이 망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을 잡고 전국시대를 종결시키며 향후 200여년간 후손들이 계속해서 권력을 잡는 시대를 열었다.

현역시절 박종선 육사 교장(왼쪽에서 3번째) 등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진급자 신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미지 확대보기
현역시절 박종선 육사 교장(왼쪽에서 3번째) 등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진급자 신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본 전국 시대 무장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박종선(69) 예비역 육군 중장 때문이다. 그는 육사 생도 4년 포함해 39년의 군생활동안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뚫고 묵묵히 군인의 본분을 다하며 성공적인 군인의 모습을 보였다. 1954년생인 그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부여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34기 출신이다. 결코 남들보다 똑똑하진 않지만, 늘 남을 배려하고 노력해 온 덕분에 별을 세 개나 달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육사 출신으로 마지막 보직을 모교인 육사에서 학교장으로서 마칠 수 있었던 것을 큰 보람으로 여겼다. 육사 교장을 했다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 대학에서도 총장이 존경받는 자리이듯이, 육사 출신 군인으로선 육사 학교장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물며 그는 육사 학교장에 이어 육사 총문회장까지 맡게 됐다. 지난 10일 육사 생도회관에서 임기 2년의 제15대 육사 총동문회장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육사 생도로 시작해서 육군 장교가 됐으며 장군이 된 후 육사 교장을 맡은 데이어 다시 육사 총동문회 회장까지 떠맡았으니 그야말로 ‘육사 지킴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해야겠다. 오직 한 길만을 묵묵히 걷다보니 평생을 육사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박 신임 육사 총둥문회장은 취임사에서 “육사는 안팎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77년간 태릉에 터전을 이어오고 있는 육사를 시골로 이전시키겠다는 정치인들이 있는가하면 화랑대와 태릉지역을 개발해 아파트를 지으려고도 한다”며 “많은 동문들은 총동창회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회의적 시간과 동문을 위해 무엇을 했냐고 질문을 하기도 한다. 과거 선배님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때로는 국가를 경영하고 사회 각계 각층의 리더로서 역할을 하던 때와는 많이 다르다”고 밝혀 위기의 육사와 육사 총동문회를 다시 활성화시키겠다고 했다.

그는 2013년 2월 군 전역직전 일반 국민에게 군과 군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해주고자 자신의 군경험을 토대로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하라’는 회고록을 냈다. 특히 우수한 학생들이 육사에 많이 지원하고 장기적으로 존경받는 군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육사 교육과 관련한 내용을 많이 담았다.

색소폰 부는 장군

그는 군 시절 배운 색소폰을 지금도 틈틈이 분다. 동창 모임이나 친구 모임 등에서 자리가 주어지면 색소폰을 들고 나가 색소폰을 불어 제낀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있게 연주 실력을 뽐낼 정도는 된다. 누구 앞에 서더라도 그다지 긴장하지도 않는다. 특히 술 한 잔을 걸치고 주변에 색소폰이 있으면 금방 ‘색소폰 부는 장군’이 돼 버린다. 육사 교장 시절에도 공관에서 손님이 오거나 생도들 앞에서 분위기기 되면 한 번식 연주하곤 했다.

색소폰과의 인연은 계룡산에서 시작됐다. 2006년 10월 사단장 진급에서 1차 탈락한 뒤 육군본부 인사사령부 인사운영처장(준장)으로 있을 때인 2007년 1월 3일 시무식을 갖고 전투체육의 날인 수요일을 이용해 인사운영처 직원 모두와 함께 계룡산으로 등산을 갔다. 등산을 겸해 정상에 가서 새해의 기를 받자는 취지였다. 계룡산 정상에서 새해 결의를 다지고 있는데 옆에 먼저 올라온 육군본부의 다른 팀에서 즉석 노래 마당을 펼치고 있었다. 야전상의를 입은 이등병이 노래를 부르는데 상당히 음치였다. 당시 지휘관으로서 ‘정초에 여기까지 왔는데 사기를 위해 노래 하나 멋지게 선물하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갖게됐다. 그는 음악이나 예능에는 선천적으로 별 재주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감동을 주기에는 타고난 재주가 없었다. 그는 ‘악기를 하나 배워야 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어떤 악기가 좋을까 생각하다 색소폰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색소폰이 중년 남자들의 로망으로 받으들여지던 시기였다. 계룡산 하산 중에 우발적으로 정한 것이 색소폰 배우기였던 것이다.

육군 군악대장에게 도움을 요청해 점심시간과 일과 후에 군악대에서 색소폰병으로부터 소리내는 법, 기본적인 운지법 등을 배웠다. 물론 군악병에게 가끔 밥도 사주고 사례를 했다. 이렇게 색소폰 배우기가 시작됐다. 자신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색소폰을 시작하면서 인사운영처 직원들에게 아예 공표를 했다. “내가 색소폰을 시작하는데 타 부대로 전출하기 전에 꼭 여러분 앞에서 연주를 한 번 하겠다. 첫 연주곡을 ‘밤안개’로 하겠다”고 말이다. 그해 4월 사단장 2차 진급 발표에서 소장으로 진급해 28사단장으로 나가게됐다. 그래서 인사운영처 식구들과 송별회를 가졌고, 그 때 약속한대로 ‘밤안개’는 물론이고 ‘마이웨이’까지 연주했다. 3개월 동안 점심만 먹으면 군악대로 달려가 20분 가까이 ‘끽끽’ 댔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사단장을 하면서는 거의 색소폰을 불지 못했지만, 부사관학교장을 끝나고 인사사령관을 할 때는 색소폰을 정말 많이 불렀다. 인사사령관은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니 처음 배웠던 군악대가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천안함 폭침사태와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1년 넘게 비상대기 상태가 이어졌다. 술도 못 먹고 어딜 가지도 못하니 색소폰이 제격이었다. 육사 교장시절에는 2011년 10월 화랑제 축제 때 생도들 앞에서도 한 번 연주를 했다. 교장이 생도들 앞에서 연주한 것은 육사 개교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육사 교장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최세창 씨를 비롯한 군선후배를 공관으로 초청한 모습. [박종선 예비역 장군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육사 교장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최세창 씨를 비롯한 군선후배를 공관으로 초청한 모습. [박종선 예비역 장군 제공]


군 시절 만난 사람들

그는 40년 가까운 군생활을 하면서 많은 상관과 부하들을 겪었다. 그중 군 생활에 영향을 끼친 사람 몇 명을 꼽아보면 장세동, 최세창, 길형보 씨등이 포함된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다. ‘의리의 사나이’ 장세동씨는 제3공수특전여단에 근무할 때 만났다. 여단장과 전속부관으로였다. 장군 진급예정자였던 장세동 대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다. 그는 세간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장세동씨에 대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그는 육사 16기 선배인 장세동씨로부터 군생활에 무슨 도움을 받거나 후광으로 득을 본 것은 전혀 없다. 군생활 동안 그가 옥고를 치르거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도움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다. 장세동씨는 월남전에서 이름을 날린 한국군의 영웅이다. 그는 생활 자체도 아주 올바랐다. 상관이나 부하에게도 늘 예의를 갖췄다. 일단 모든 면에서 윗사람을 깍듯이 대했다.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박 장군은 ‘검단지즉 일보전진 여건불비 노력배가(劍短之則 一步前進 與件不備 努力倍加)’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이 말은 장세동씨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후배나 부하들이 오면 책을 한 권 주면서 이 말을 한자로 써주었다고 한다.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하라’는 말은 박 장군의 회고록 제목이 됐다.

최세창씨는 3공수 특전여단과 합참에서 직속 상관으로 모셨다. 특히 최세창씨가 합참의장으로 있을 때, 그가 전역할 때까지 15개월간 전속부관으로 수행했다. 최세창씨는 한 마디로 ‘덕장’이었다. 비록 12·12사태와 관련해 옥살이를 했지만 군인으로서는 인품이 굉장히 훌륭했다. 절대로 아랫사람에게 불합리하거나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거의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다. 항상 기다리고, 부하가 해오는 것이 조금 부족해도 “그래 그만큼 했으면 잘했다”고 격려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자신이 채웠다. 최세창씨는 미국 특수전 학교를 다녀오는 등 젊었을 때 유능한 장교로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 불미스러운 일로 징역을 살고 나온 후에는 일체 사회 일에 관혀하지 않는다. 박 장군은 요즘도 시간이 나면 식사 등을 모시곤 한다.

다음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길형보 장군이다. 길형보 장군을 1사단장때 인사참모를 첫 인연으로, 3군사령관, 참모총장 등으로 있을 때 모셨다 개인적으로 길 장군으로부터 군생활의 멘토로, 또한 스승으로 정신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진급이나 보직에서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가 장성 진급 등 필요할 때는 길 장군이 전역한 상태였다. 길 장군은 바늘 하나 안 들어갈 정도로 아주 치밀한 스타일이다. 품성이 온유해서 ‘덕장’으로 분류되고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데 업무는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길 장군은 참모총장을 할 때 ‘사·여단장 중심의 교육훈련 체계’를 정착시켰다. 사·여단장 중심으로 부대를 지휘하고 교육훈련을 책임지라는 내용이었다. 육군본부는 예산지원이나 정책적인 것, 즉 큰 그림의 방향을 정해주고 예하 부대가 소신껏 전투 준비와 교육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다.

박종선 예비역 중장이 육군 제15보병사단 38연대 전우 만남의 날 행사에서 최영철 15사단장, 김명종 38연대장, 부대관계자 및 가족 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원일보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박종선 예비역 중장이 육군 제15보병사단 38연대 전우 만남의 날 행사에서 최영철 15사단장, 김명종 38연대장, 부대관계자 및 가족 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원일보 제공]


‘대한민국 사랑합니다’ 카톡 이야기

20대 후반 박 장군이 3공수부대 중대장 시절, 군대 생활에서 영원히 잊기 힘든 경험을 했다. 공수부대는 전쟁이 나거나 명령이 떨어지면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게 임무이다. 여기서 명령은 평상시라도 적의 도발이나 공격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응징· 보복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당시 그에게 최단시간내에 작전 준비를 마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손톱과 발톱을 깎고 머리털을 한 움큼 잘라 각자 작성한 유서를 흰 봉투에 넣어 대대장에게 제출했다.칠흑같은 밤에 낙하산과 산악복을 착용하고 C-123 수송기에 탑승했다. 완전무장한 중대원을 태운 수송기는 동해안 철책을 따라 북으로 비행했다. 한동한 깜깜한 바다위를 날아가던 비행기 기내 조명이 밝아지더니 문앞에 앉아있던 대대장이 기내 송수화기를 잡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두 손을 들어 크게 엑스(X)자 신호를 보냈다. 작전 취소 사인이었다. 당시 그는 중대원 모두 한 사람도 주저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기거이 한 목숨 조국에 바치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의 중대원들과 주기적으로 만나는 등 생사고락을 함께 넘나든 전우애는 변치 않고 있다.

박 장군의 카톡에는 자신의 사진이나 가족 사진 등이 올라있지 않다. 대신에 태극기를 여러 사람들이 원형으로 둘러싸 손을 잡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랑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그의 국가관과 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잘 보여준다.

[김학수 월간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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