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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0] [박주현의 산행 수필] 설악산에서 '오상아(吾喪我)'의 가치를 배우다

| 2023-03-09 11:07
설악산 대청봉에 선 필자.이미지 확대보기
설악산 대청봉에 선 필자.
세간엔 낱말뜻처럼 한계령(寒溪嶺)은 차디찬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알려져있지만, 모지리에겐 살다가 살다가 어려움으로 한계(限界)에 부딪혔을 때 찾는 곳으로 인식되어왔다. 체감 온도 영하 30도로 한계령휴게소를 들머리로 하여 끝청, 중청, 대청 찍고, 오색으로 날머리하는 7시간 고행(苦行)한다.

가난한 아빠라 애들에게 필요할 때 내줄 돈도 없고, 올바른, 미래의, 주인의, 애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얘기해 줄 식견도 없는 터에, 요즘들어서 건강까지 자신 없으니 불안하다. 이런 비참한 모습 보이기 싫고 강한 척 하기 위해 북극 한파 몰아치는 때에 한계령, 설악산으로 향한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시인 정덕수의 시 ‘한계령에서’....

정덕수 시인은 설악이 고향이다. 대청봉으로 이어진 최단 경로인 오색에서 태어났다. 지독히 가난해 모친은 그가 어릴 적 집을 나갔고, 보살핌을 받을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설악을 헤매며 나무지게를 멨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막일로 삶을 이어가다 열여덟 살이 되던 1981년 다시 한계령을 찾았다. 굽이굽이 뻗은 산과 계곡, 바람 앞에 선 순간 모질었던 세월이 스쳐가고 ‘울지 마라’고 위로하는 설악을 다시 만났다.

위선과 속임수로 잘난 척 해야 하는 오염된 서울 살이가 적응하기 쉽지않았던 어린 시절의 정덕수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오버랩된다.

시인 정덕수와 홀든 콜필드가 하고싶은 말은 "바람직함을 지키는 삶 보단 바라는 걸 이루는 삶,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 보단 자기 꿈의 실현자, 사회 구성원의 일인(一人) 보단 유일한(unique) 나"를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호밀밭의 파수꾼>은 미성숙한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위선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다. 성적이 나빠 기숙학교에서 쫓겨나 오염된 뉴욕에서 방황하면서 겪은 3일간의 이야기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사회의 분위기를 알아야만 한다. 1930년대 좌파 진보주의 시대를 겪은 미국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 전후사회로 접어든 1940년대 후반부터는 차츰 우파 보수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파괴적 전쟁을 겪은 제대군인들과 그 세대들은 평화와 안정을 원했고, 그 결과 미국은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해 현대판 좌파 마녀사냥을 주도한 극우 매카시즘이 사회전반에 걸쳐 횡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몸을 사렸고, 작가들은 비정치적인 작품을 썼으며, 사회는 젊잖음과 안정을 내세워 보수로 회귀하고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눈 쌓인 설악산과 동해바다가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이미지 확대보기
눈 쌓인 설악산과 동해바다가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설악산은 겨울이 아름다운 산이다. 특히 눈이 쌓여 하얗게 변한 산줄기는 말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설악산은 설봉산·설산·설화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언제나 '눈 설(雪)' 자를 늘 첫머리에 둔다. 그만큼 겨울 풍광이 멋지다는 말이다. 오늘 설악산은 며칠간 북극 한풍(寒風)으로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눈 쌓인, 거기에 북극 한파에 강풍까지 몰아치는 설악산은 위험하다. 거꾸로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비경이 펼쳐지고, '오상아(吾喪我)'하기에 적격으로 순간순간 모지리의 눈과 가슴을 놀라게 한다. 오상아는 ‘본래 면목의 내(吾)’가 ‘살면서 만들어진 나(我)’를 초상 치러 없앤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울수록 마음의 경쟁력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무아(無我)의 상태이다.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대청을 오르는 내내 잡목에 쌓여 얼어붙은 눈꽃이 터널을 만든다. 눈꽃 핀 터널을 지나 간간히 능선너머로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밀려오면 마치 설국(雪國)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눈꽃을 지나는 산객들은 빙판길의 고달픔도 잊은 채 연신 탄성을 지른다. 그러다 오색으로 하산하면서 산객들은 왜 산에 왔는지 고뇌에 가득찬 모습으로 변한다.

한국현대건축의 큰 인물 고 김수근이 설계한 한계령 휴게소.이미지 확대보기
한국현대건축의 큰 인물 고 김수근이 설계한 한계령 휴게소.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한계령휴게소는 등산객들로 활기찬 모습이다. 이 휴게소는 한국 현대건축사의 큰 인물인 고 김수근 선생의 작품이다. '자연과 가장 어우러진 건축물'로 평가받으며 1982년에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휴게소 식당 안 테라스에 서면 설악산의 장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휴게소에서 한계령 갈림길까지는 꽤나 급한 오르막이다. 등산객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눈이 단단하게 굳어 걷기가 편하다. 아이젠의 톱니가 턱턱 잘 박혀 미끄럽지도 않다. 하지만 발을 조금만 옆으로 디디면 무릎까지 푹 빠져버리고 만다.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부드러운 눈 속에 스틱을 딛으면 몸이 쏠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계령 삼거리부터는 제법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등산지도에 표시된 난이도는 '어려움'이었으나 '보통' 정도로 수정해도 될 듯하다. 오히려 삼거리에 이르기 직전 1.2Km의 구간이 '보통'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그 구간은 '어려움'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

드디어 한계령삼거리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귀때기청봉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오른쪽 능선길을 따르면 1,400m봉~1,459m봉~1,474.3m봉~끝청을 지나 대청봉까지 이어진다. 그 거리가 약 5.1km. 갈 길이 멀다.

"맞다 맞다, 그렇다. 이제부터 고행(苦行)의 긴 구간이다. 흐미"

이제까지 기(氣)를 쓰며 능선에 올랐는데 갑자기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정상으로 오르기 전에 내리막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을 또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얼마나 고생을 시키려고

설악(雪嶽)이~ 흐미 설악(雪惡)으로 바뀐다.! 모지리를 천당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렸다 내렸다, 내렸다 올렸다 한다.

북극 한파보다 무서운 것으로 바람(6m/s)때문에 사진 한번 찍으려면 순간 손이 냉동이 되어버리는 무리수를 둬야한다. 더군다나 능선길이라 한풍(寒風)을 피할 수도 없다.

설악산 능선들이 파도를 타듯 이어지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
설악산 능선들이 파도를 타듯 이어지고 있다.


역시 이곳은 설악이다. '내가 이 나라 바위산 중 제일 맏형'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곳곳에 거친 바위를 잠복시켜 두었다. 발바닥엔 불이 나고 있었지만 곳곳에서 장쾌하게 전망이 터지는 덕분에 눈은 제대로 호강하고 있다. 외설악과 내설악의 수많은 바위 능선이 눈길을 끌고, 북으로 공룡릉을 거쳐 황철봉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힘차다. 남쪽으로는 구불구불 한계령을 넘는 도로가 장관이다. 맞은편 점봉산의 모습도 장쾌하다.

과연 서북능선은 지루한 인내와의 싸움이었다. 능선에 오른 지 세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비슷한 길을 계속 걷고 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찬양했다는 기기묘묘한 바위산의 풍광도 체력 떨어진 모지리에게는 '먹지 못하는 음식'일 뿐이었다. 줄곧 앞사람의 발끝만 보고 걷자니 누군가가 "조금만 가면 끝청"이라며 희망을 준다.

1474.3m봉 구간과 끝청 오르막은 잡목이 무성해 사뭇 답답한 분위기이지만 끝청에 올라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귀때기청봉을 거쳐 안산을 향해 뻗어나간 서북릉, 용아릉과 공룡릉이 수놓은 듯한 내설악은 물론, 북쪽 멀리 흰 눈 인 금강산까지도 한눈에 바라보이고, 점봉산과 가리산 그 뒤로 펼쳐지는 첩첩산릉의 아련한 풍광이 또한 마음을 빼앗는다.

끝청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20분 거리로, 오르내리막이 반복돼 체력이 약한 모지리에겐 고단한 구간이다. 특히 지금처럼 한풍과 적설량이 많을 때에는 진을 짜낸다.

흐미, 이래서 설악산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중청 대피소 모습.이미지 확대보기
중청 대피소 모습.


중청대피소는 사람으로 꽉 찼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취사실로 내려가 간신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부침개와 따뜻한 도시락으로 맘껏 사치를 누린다.

"빨난 우체통이다!"

매점에서 엽서를 판다. 거기에 글을 써서 이 우체통에 넣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수거해서 배달된다고 한다.

JTBC 방송국 PD에게 엽서를 한 장 얻었지만 쓸 말이 없어 한참이나 고민했다. 고작 '안녕?' 두 글자만 쓰고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인생(人生) 전인미답(前人未踏)' 하나 달랑 적어서 우체통에 넣었다. 이러니 애들이 좋아하겠나?

흐미 대청봉이나 올라가야겠다.

괜히 민망해서 길을 재촉한다. 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는 너덜길을 올라 20분이나 걸린다. 한풍이 모지리를 매섭게 막아선다. 몸이 흔들린다. 산객들은 오색 코스에서 출발했건 한계령 코스에서 올라왔건 '대청봉'이란 고지를 앞에 둔 터라 얼굴엔 너도나도 웃음꽃이 핀다.

드디어 한계령을 출발한 지 4시간 30분 정도에 대청봉에 올랐다.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 해서 예전에는 그저 청봉(靑峰)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봉정(鳳頂)이라고도 불렸었다. 한라산(1,950m)과 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라 시시각각 기상이 변하고 바람도 강하다. 그런데 이날은 거짓말처럼 날씨는 맑았지만 한파와 바람은 미친듯 강하게 온몸을 후려친다. 정말 내가 전생에 무슨 악(惡)과 선(善)을 쌓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정상석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 인증샷 한 커트 찍어주다가 그만 내 손이 얼어붙었다. 눈물이 돈다. 짝퉁 오상아(吾喪我)를 체험한다.

오색 약수터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입구. 이미지 확대보기
오색 약수터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입구.


이제는 오색으로 하산만 남았다. 그런데 하산도 만만치가 않다. 가파른 계단과 너덜지대를 따라 2시간 30분 정도를 줄곧 내려가야 한다.

오색코스는 그야말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래도 올라올 때 체력을 어느 정도 남겨둔 덕분에 다리가 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멈춰 쉴라치면 다리가 후들후들 절로 '개다리 춤'이 춰졌다. 내리막이 이렇게 힘든 줄은 미처 몰랐다. '짧고 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1980년 12월8일 밤 11시경 뉴욕의 맨해튼에 울린 다섯 발의 총성은 세계의 음악 팬들을 경악시켰다. 한때 예수보다 더 유명했던 비틀즈의 리더 존 레논에게 다섯 발의 총탄을 발사하고,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범인이 꺼내들고 읽고 있던 책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경전으로 추앙받는 베스트셀러이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없애야할 책, 대학 강의실에서도 금지시켜야할 책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장통을 앓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위선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다. 성적이 나빠 기숙학교에서 쫓겨나 뉴욕에서 방황하면서 겪은 3일간의 이야기가 골자다. 16세 땐,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겁 없는 시기다. 아이와 어른의 중간지점으로, 아직 순수한 시각은 잃지 않았으면서도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는 어른들의 세상도 보인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고분고분하지 않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정연한 사회제도에 길들여지기를, 기성세대로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그에게는 고문 변호사인 아버지와 피비라는 여동생,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형이 있다.

부유한 계층에 속해 있는 주인공은 현대사회의 추악한 속물근성과 지식인 계층의 위선에 염증을 느낀다. 그는 공부에 대한 의욕을 상실해 명문 사립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대학 가기를 거부한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조차 없는 낙제생 홀든 콜필드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낯선 뉴욕의 뒷골목을 떠돌며 오염된 현실세계와 직면하고 더욱 큰 상실감을 맛보게 된다. 짧은 방황 속에 만난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신뢰할 수 없는 기성세대들이다.

이 같은 기성세대의 위선과 비열함에 절망한 주인공은 어린이들에게 애정을 갖게되고, 호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한다. 질식할 것 같은 뉴욕을 벗어나 한적한 숲속에서 살고자 먼 곳으로 떠나려고 결심한 주인공은 여동생 피비의 믿음과 사랑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피비의 맑은 영혼이야말로 고독한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를 지켜주는 파수꾼이었던 것이다.

학교라는 제도로 표상되는 보수적 기성세대의 위선과 허위를 고발하며, 분연히 학교를 떠나 뉴욕의 거리를 방황하는 홀든 콜필드의 체제 저항적 태도는 당시 억눌려있던 젊은이들의 가슴에 반항의 불을 지피는 기폭제가 되었다. 홀든 콜필드의 거칠 것 없는 언사, 당시로서는 사회적 터부였던 적나라한 욕설, 그리고 시원하게만 느껴지는 그의 저항적 태도는 젊잖음을 추구하던 미국문단에도 충격적이었지만, 허위와 기만속에 안정을 추구하며 살고 있었던 기성세대에도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홀든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홀든은 예리한 감각과 지각력을 가진 젊은이다. 홀든은 이 세계가 진정한 교류와 상호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홀든은 위선과 허위로 점철되어 있는 기성세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좌절하며, 구토증을 느끼며 고뇌하는 현대인의 전형이다. 홀든은 단순히 막나가는 반항아가 아니라, 비인간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홀든에게 기성세대가 구축한 객관적 세계는 어떤 의미였을까?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고 경제적 호황의 연속을 위해 기성세대의 선택은 사립학교와 중산층 가정, 교외의 저택에서의 바비큐 파티, 고급 가전제품 등을 통한 영화와 TV에서는 가족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담은 홈드라마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과 품위로의 회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장치로 사용했다. 이는 미국사회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것이 번영을 약속하는 '정치의 쇼'라 할 수 있다.

홀든의 방랑과 탐색의 또 다른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 탐색이다. 그는 기차에서 만난 급우 어머니에게는 자신을 루돌프 슈미트라고 소개하며, 호텔방으로 찾아온 창녀에게는 자기가 짐 스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밤거리의 방황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물론 타자와의 만남과 연관 속에서 형성되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타자와의 만남에는 언제나 진정한 교류와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홀든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교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홀든은 늘 외롭고 고독하다. 그가 보는 성인들의 세상은 모두 허위와 가짜로 되어 있고, 그는 거기에 혐오감을 느낀다. 홀든이 자주 현기증과 구토증을 느끼는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홀든이 사회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현실과 연관을 맺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참여와 연관에 대해 부단히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결국 그 자신도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되어 들어간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미국 사회에 끼친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1951년 출간 이후 미국 대학생들에게 경전처럼 읽혔고 ‘샐린저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샐린저 현상은 기성세대의 질서와 안정, 허위와 위선을 거부하는 일종의 정신적 운동을 일컫는다. 미국 저명인사들의 살해범 다수가 이 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존 레넌의 살해범인 마크 채프먼은 체포 당시 이 책을 읽고 있었고,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월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저격 미수범인 존 헨릭도 이 소설을 좋아했다. 음모론을 다룬 멜 깁슨 주연의 영화 ‘컨스피러시’에서는 주인공이 불안할 때마다 이 책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소설은 지금도 미국에서 매년 30만부씩 팔린다고 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언어가 '거칠고 세속적이고 외설적이며, 세상을 가짜라고 비난하는 홀든이야말로 가짜"라고 혹평한다. 또한 끝없는 신성모독과 외설스러운 말로 점철되어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판자들이 화를 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소설이 기성세대의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류대학을 가는 것이 성공의 척도인 가짜 세상, 연봉 쎈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인 이상한 삶, 자기의 정체성이나 자기의 꿈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 애들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하다.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잘하는 것이 있어야 장래를 결정하고 꿈을 꿀 텐데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고싶은 것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는데 가난한 모지리 아빠에게 얘기한들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애들은 효자 효녀다. 역시 삶은 고해(苦海)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그래도 애들에게 모지리 아빠가 떠들어본다. 애들아~"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함을 지키는 삶 보단 본인이 바라는 걸 이루는 삶을 추구해, 사회의 보편적 이념을 수행하기 보단 자기 꿈의 실현을 추구하고, 사회 구성원의 일인으로 부속품처럼 처신하기 보다는, 유일한(unique) 자존감있는 자신으로 생활해"로 방점을 찍었으면 한다.

꿈꾸지 못하는 자는 날아 오를 수 없다. 비현실적인 꿈이면 어떻고 홀든처럼 세상을 방황해보면 또 어떠한가. 그것은 젊기에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생 전인미답(前人未踏)아닌가?

[글/사진=박주현]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 ROTC 27기. 하나은행 등 금융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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