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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0] [마니아 휴먼 스토리] 박토에서 피어난 '사랑의 의술'...정밀기술공 출신 의사 김충환

김학수 편집국장 | 2023-03-09 11:08
김충환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공고를 졸업,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정밀기술공으로 수년간 근무한 뒤 늦은 나이에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됐다.  이미지 확대보기
김충환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공고를 졸업,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정밀기술공으로 수년간 근무한 뒤 늦은 나이에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됐다.
1970년대는 산업화시대였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수출만이 살길이다며 온 국민이 뛰었다. 이 시대의 젊은이는 영화 ‘국제시장’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제시장 세대는 6·25동란을 겪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부산 국제시장에서 미국에서 보내준 원조 구호물자에 힘입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뒤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 위험천만한 월남 정글로, 독일의 뜨거운 탄광 광부로, 시체를 닦는 독일의 간호사로 돈을 벌러 나갔다. 1930-40년 세대가 ‘국제시장 1세대’였다면 1950년대 세대는 ‘국제시장 2세대’라고 부를만하다. 오일달러의 중동 건설 특수붐이 불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에서 먹거리를 찾았다.

1977년, 그도 약관의 나이에 이 대열에 합류했다. 산업의 역군으로 ‘열사의 나라’ 사우디 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근무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정밀가공 기술공으로 사우디로 날아가 돈을 벌었다. 정밀가공 기술공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난 ‘줄 작업’교육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전문 기술을 인정받았다. 국내에 취업중인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 2배 이상의 봉급을 받았다. 착착 쌓인 봉급은 집으로 최소 생활비만을 빼고 송금했다.

하지만 가슴 한켠에는 홀로 떨어져 있다는 외로움과 허전함, 그리고 막막함이 자리잡았다. 이역만리 사우디 사막에서 밤마다 별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마마 장애를 갖고 있던 손위 누나 등 가족이 늘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둥지를 떠나 뜨거운 모래바람을 뒤집어쓰며 밥벌이를 해야했기에 가족애가 간절히 그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날품팔이 행상으로 자신을 어렵게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해준 어머니를 위해 효도를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오로지 아들의 성공만을 기원하며 힘든 삶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생활이 고달플 때, 어머니는 혼자서 슬픈 트로트 노래를 불렀다. 그는 어머니가 노래로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홀로 눈물을 흘리며 돈을 먼저 벌자고 다짐했다.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대학을 가겠다며 인문계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공업고등학교를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태어나자 마자 마마를 앓아 얼굴에 움푹 패인 자국이 많은 누나는 그에게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누나는 마마 상처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떳떳이 나서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맴돌았다. 하지만 남동생을 위해 아낌없이 손발이 돼 주었다. 몇 살 터울의 누나는 얹어주고 재워주고 먹여주며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워줬다. 어머니가 생업으로 집을 비우면 동생을 위해 밥을 지워주고 말동무가 돼 주었다. 커가면서 누나를 치료를 해줘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은 누나에게 받은 것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사우디에서 수년간을 보내고 특례보충역으로 근무해 병역문제를 해결한 후 그는 어릴 적 꿈이었던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 입학을 위한 입시공부를 했다. 어렵게 들어간 의대였지만 기초가 부족한 공부를 하느랴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나는 동급생들과 공부를 하면서도 의사의 꿈은 더 강해졌다.

의대 학생 생활은 당초 생각핬던 것보다는 차원이 달랐다. 벽돌장 두께의 두터운 영어 원서, 많은 공부량, 잦은 실습 등은 중동 건설 기술공으로 다져진 그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도 버텨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나는 동급생과의 관계도 만만치 않았다. 힘들었던 의대 학생시절, 같은 대학을 다녔던 부인 김영민씨를 만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힘들 때마다 격려를 해주고 용기를 북돋워줬다. 수줍고 다소 외골수적인 성격을 가진 그와는 영 반대 성격이라 서로를 보완하면서 힘이 됐던 것이다.

청주 김충환 클리닉 내부 모습.이미지 확대보기
청주 김충환 클리닉 내부 모습.


의사 김충환, 최고 보다 최선의 의술을 지향하다


중동 근로자, 뒤늦은 의대생, 봉급 의사를 거쳐 2000년초반 청주에 개인병원을 차렸다. 다른 의사들보다 훨씬 어려운 길을 걷다가 이뤄낸 개업이었다. 김충환 가정의학과의원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자신의 이름을 상호로 삼은 것은 고객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된 것은 수술 보다는 병을 예방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 습관이 병을 만드는 일이 많다. 먹고 자고, 움직이는 것 모든 행동 습관이 병의 원인이 된다. 물론 유전적인 요인이나 사고 등으로 생길 수도 있지만 평소 생활 관리가 아주 중요하다.” 다른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의사가 된 만큼 다양한 인생 경험을 활용해 고객들과 소통을 잘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개업의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최고의 의사보다는 최선의 의사를 지향한다. 경쟁에서 일등이 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성과를 올리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다듬는 좋은 의사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청주에서 개업의를 활동한 것이 벌써 20여년이 됐다. 김 원장의 가치를 인정하는 고객들이 많아져 그의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중에는 충북도지사를 2번 연임한 이시종 전 지사도 있다. 이 전 지사는 여러 번 그의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고 만족해 했다고 한다.

그의 강점은 손기술이 좋다는 것이다. 중동 근로자로 정밀가공기술 자격증도 갖고 있는 그는 차분한 성격으로 고객들과 상담을 통해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하고, 치료가 필요한 부위를 섬세한 손놀림으로 처리한다. 같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도 최대치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고객들의 반응이라고 한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병원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손위 누나의 마마 자국은 그의 세밀한 손솜씨에 의해서 점차 좋아졌다. 두꺼운 화장으로 마마 자국을 감추던 누나는 점차 얕은 화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고객과 친구는 삶의 동반자

그는 의사이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고객에게도 그렇고,고교 친구들에게도 그렇다. 고객에게는 의사로서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자연스럽게 고객들을 맞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겸손함은 고생을 통해 몸에 배었다. 한번 그의 병원을 찾으면 그의 친절함과 편안함 때문에 단골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교 친구들에게도 똑같다. 성격이 활발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긋나긋 조용한 목소리로 상대를 배려하는 성격이 돋보인다. 친구가 경조사를 당하면 전국 어디라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찾아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한다. 영국 속담에 ‘친구가 없는 것은 혼이 없는 몸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오래된 고겨 친구들을 보면서 삶의 소중함을 느낀다고 한다.

청주에서 만나는 고교 동문 모임도 그가 꼭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서울에서 내려와 청주에서 공장 근무를 하다가 눌러 살게된 선배들이 많은 고교 동문 모임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베풀는 것을 좋아한다. 평소 아끼고 절약하지만 필요할 때는 넉넉하게 쓰는게 그의 생활철학이다. 그가 고교 동문들을 좋아하는 것은 학생 시절 어려움을 같이 겪었기 때문이다. 동문들은 어려움 속에서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의 고교 동문들은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첫 평준화가 시작된 인문계 고교로 가지 않고 가난한 인재들이었다. 당시 서울공고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특목고’라고 할 수 있었다.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의 반 친구들은 졸업 후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중동 건설 현장, 제철과 석유화학 회사 등에 취업했고, 일부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의 친구 가운데는 현재 의사인 그를 비롯해 박사 3명, 상장회사 CEO 등이 배출됐다. 같이 어려움을 겪었고, 비슷한 생각을 가져 수십년간 많은 고교 친구들이 부부동반으로 스스럼없이 모임을 갖는다.

김충환 전문의가 부인과 함께 바닷가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
김충환 전문의가 부인과 함께 바닷가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정과 예술에서 ‘끼’를 보이는 남자

그는 어느듯 성공한 의사의 반열에 올랐다. 골프를 칠 법도 하지만 몇 번 쳤다가 이내 그만뒀다.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고 자신의 성격이 잘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골프가 좋은 운동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와 내기 골프를 해야 하는 것도 별로 탐탁치 않았고... 아내는 골프를 치지만 나는 잠깐 골프채를 잡았다가 놓았다. 골프 대신 다른 재미있는 일을 찾아 즐기고 있다.”

그는 술도 즐겨 하지 않는다. 술 자리를 마다 하지는 않지만 자리에서 술은 1~2잔만 한다. 술먹는 사람들의 얘기를 주로 듣는 편이다. 취미활동으로 차박텐트, 댄스, 소리 창 배우기 등을 즐긴다. 카니발 차량을 개조해 아내와 함께 호수, 강, 바다 등을 찾아 다니며 하룻밤을 지내는 차박을 자주 한다. 캠핑을 하면서 우두커니 ‘불멍’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부부가 같이 스텝을 밟고 춤을 추기도 한다. 각종 모임에서 부부가 스텝을 맞춰 춤을 추는 것을 즐긴다. 소리 창을 배운 것도 다른 친구나 지인들과 친화감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보니 각종 자리에서 가는 자주 초청을 받는다. 부부가 예전 소리꾼 흉내를 내는 것을 들었다.

단가 이 산 저 산의 한 대목을 구성지게 불렀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 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데 있나‘
비록 아마추어로 배운 솜씨이지만 부부가 낸 구성진 소리는 자리에서 한껏 흥을 키워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나면 오케스트라, 연극 공연 등을 자주 찾는다. 서울에서 보고 싶은 좋은 예술 공연은 미리 꼭 점찍고 찾아가 볼 정도이다. 클래식, 가요, 팝, 재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귀에 딱 감기는 음악도 모두 좋아한다. 특정한 예술 편식증이 없다는 것이다.

어릴 적 극도의 빈곤으로 많은 고생을 했던 그는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소셜미디어(SNS) 자신의 화면이 아내와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일 정도로 다정한 부부의 형상을 보여준다. 부부 사이에는 1남1녀를 두고 있다. 그는 가정을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여긴다. 온 가족이 합주자가 돼 아름답고 멋있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학수 월간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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