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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0] [휴먼 오딧세이] 서울올림픽 금메달 출신 신임 레슬링협회 부회장 한명우

이신재 | 2023-03-0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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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먼 길을 돌았다. 결국 그리될 줄 알았다.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온 ‘귀향(歸鄕)’이었다.


레슬링, 그건 그의 고향이다. 지금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지만 그가 한창 선수로 뛸 때 레슬링은 더없는 ‘효자’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길을 뚫었고 정상에도 섰지만 고난의 길이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35년, 이제 은혜를 갚기 위해 ‘머언 먼 뒤안길을 돌아온’ 사람처럼 다시 거울 앞에 섰다.

1982년, 스물넷의 전성기였다. 뉴델리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1등 했다. 하지만 꿈에도 그렸던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협회 임원들이 각별히 키우고 보호했던 선배가 덜렁 뉴델리로 갔다.

선발전에선 졌지만 국제 경험이 더 많고 노련해서 금메달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그는 길길이 날뛰며 대들었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말 안 듣는 놈’이라는 미운털만 박혔다. 금메달감이라고 했던 선배는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레슬링이 일본 등에 밀려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때로 아시안게임의 금메달도 아주 귀했던 시절이었다. 결과적으로 레슬링은 뉴델리에서 1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했다.

레슬링을 집어치웠다. 화가 나서 매트를 뒹굴 수 없었다. 복싱으로 전향했다. 주먹 힘이 강하고 맷집이 좋다며 복싱 선배들이 더러 유혹했고 복싱이 레슬링보다 더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내 돌아왔다. 그냥 홧김이었지 정말 할 건 아니었다. 한국체육관의 선배들도 호통을 치며 그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음 선발전 때 또 그를 눌렀다. 이번엔 바꿔치기가 없었다. 실력 차가 확실했다. 1984년 LA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68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유인탁과 함께 메달 기대주였다.

그러나 초반 탈락, 복싱의 김광선과 함께 일찌감치 서울로 돌아왔다. 김광선은 그보다 더 기대주였으나 1회전에서 졌다. 둘은 2년 후 서울아시안게임, 4년 후 서울올림픽을 기약하면서 여행길에 올랐다. 집에 갈 수가 없었다. 그 시간 고향의 어머니는 아들의 메달을 위해 치성을 들이고 있었다.

세월은 훌쩍 훌쩍 흘렀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자유형 74kg급 대표로 선발되었다. 국제대회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린 터여서 금메달을 자신했고 일본의 숙적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레슬링이 처음으로 일본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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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서울올림픽, 너무 멀었다. 어느새 서른이었다.

“88년이면 서른둘인데 뭘 하기엔 좀 늦었죠. 새로운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하지만 눌러앉았습니다. 장창선 협회 전무가 막무가내로 막았습니다. 이건희 레슬링협회 회장이 왜 공들여 키운 인재를 타국으로 보내냐며 활용할 길을 찾으라고 했다고 하는 겁니다.”

장창선전무는 도쿄 올림픽 은메달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였다. 그가 말리고 뒤에 이건희 회장이 있다고 하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캐나다로 간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국가대표 트레이너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대표팀 첫 트레이너였다. 꼭 필요한 자리였다. 대표팀 감독들이 나이가 좀 있어서 젊은 선수들과 맞잡이로 훈련하기는 힘들었다. 선수들과 함께 뒹굴며 그들의 장단점으로 지적해주고 경기 운영 능력을 키워 주었다.

트레이너는 꽤나 고된 ‘직업’이었다. 이 선수, 저 선수 받아주다 보니 어느 날은 선수들보다 더 많이 뛰기도 했다.

올림픽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트레이너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섰다. 이제 74kg급은 무리였다. 82kg으로 체급을 올렸다. 한국인, 아니 동양인에겐 감당이 안 되는 중량급이었다.

그 역시 무리라고 여겼으나 일본의 다떼가 적극 권장했다. 그는 올림픽 자유형 74kg급 금메달리스트였다. 동양인 역대 최중량 금메달이었다. 일본 국사관 대학 전지훈련 때부터 그를 잘 돌봐주었던 다떼는 ‘너는 스피드가 있고 몸이 유연하니까 82kg급도 하다고 했다.

모두 다 아니라고 했다. 88년이면 서른둘인데 체력적으로 무리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나름 자신 있었다.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니 선수 시절엔 보이지 않던 경기 흐름이 보였다. 힘을 앞세운 레슬링이지만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힘쓸 때와 힘 뺄 때를 터득했다.

힘은 들었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등 했다. 그러나 단독이 아니었다. 3명이 1승 1패를 주고받아 공동 1위였다. 한 명은 스물여섯, 다른 한 명은 스물여덟이었다.

한이라도 풀게 하지

최종 선발위원회가 열렸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으나 분위기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누가 나가도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서너 명이 가장 젊은 선수를 추천했다. 경험을 쌓게 해서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다. 나머지도 다르지 않았다. 그로 결정될 때쯤 한 명이 다른 주장을 했다.

“그 친구가 올림픽에서 경험을 쌓으면 다음 올림픽에선 메달 딸 수 있을까.”

“턱도 없지. 그냥 그렇다는 거지. 다음에도 메달은 없어. 지금이 가장 좋을 때일 뿐이지.”

“그렇다면 굳이 그 친구를 뽑을 필요가 있나. 노련한 선수를 내보내는 게 낫지.”

“그렇긴 하네. 나이 먹은 놈 한풀이라도 하게 하지. 국제 경험까지 따지면 같은 성적이라도 그 친구가 더 우위지. 혹시 또 알아. 우리나라에서 경기를 하는 데다 노련하고 경험도 풍부하니 뜻밖의 성적을 낼지.”

“그 친구가 머리는 좋지. 메달을 딴다든가 하는 일은 없겠지만 스물여섯 살 짜리 보다 나을 수 있겠네.”

그렇게 그는 멀어졌던 서울올림픽에 출전했다. ‘늙은 놈, 한풀이라도 하게 하자’는 아주 간단한 논리로 우기고 또 우겨서 서른둘에 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래도 그의 메달은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당시 협회가 금메달로 꼽고 심혈을 기울였던 선수는 자유형 48kg급의 이상호와 그레코로만형 57kg급의 허병호였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선수들로 최소 동메달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선에서 어이없이 나가떨어졌다. 이상호는 일본 선수와의 경기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허병호는 뜻밖의 상대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그에겐 눈길을 주지 않았다. 82kg는 동양 선수에게 난공불락의 체급이었고 세계적인 선수들이 너무 많았으며 그는 서른둘의 한물간 노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 편성표를 보면서 잘하면 동메달 전엔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었다.

세계랭킹 1~4위가 모두 A조에 몰렸다. 그는 운 좋게 그들을 피해 B조에 포함되었다. 그보다 위는 랭킹 5, 7위 정도뿐이었다. 그의 랭킹은 8위 정도여서 둘 중 한 명만 꺾으면 조 2위를 내다볼 수 있었고 그건 매우 힘든 일은 아니었다.

1차전 승리, 2차전 승리. 목표의 절반까지 왔다. 그런데 3차전이 문제였다. 일본 선수의 버팅으로 이마를 다쳤다. 피가 줄줄 흐르는 큰 부상이었으나 사실 경기력과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 흘러나온 피가 흰 붕대를 빨갛게 물들였지만 3차전도 통과했다. 부상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피로 붕대가 흥건히 젖으면 붕대를 교체하느라 잠시 쉴 수 있었다. 몇십초에 불과했지만 서른둘의 그에겐 그야말로 ‘꿀 휴식’이었다.

대망의 결승. 이만하면 됐다 싶었지만…

어찌어찌해서 조 경기를 모두 마쳤다. 1위였다. 결승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조 예선전을 치른 후 토하고 또 토했다. 몸도 만신창이고 속도 엉망이었다. 더 이상은 힘들었다. 기권하고 싶었다. 은메달만 해도 정말이지 감사할 일이었다.

결승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시간. 체력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마음도 동하기 시작했다. 은메달도 훌륭하지만 마지막 무대에서 모든 걸 다 쏟아부어야 시원할 것 같았다. 져도 그만이지만 끝난 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결승 상대가 기권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어는 심판이 금메달을 노릴 만하다며 몰래 일러주었다. 세계적인 강자 5~6명이 치고받느라 오른팔을 심하게 다친 것 같다고 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믿지 않기로 했지만 은근히 기대되었다.

마침내 결승. 낮은 자세로 접근하다 그의 오른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대로 끌려왔다. 태클에 성공하며 2점을 올렸다. 다친 게 확실했다. 순간 고민했다. 한 번 더 잡아채서 확실하게 승리를 확보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접었다. 그건 스포츠맨이 할 일이 아니었다. 이겨도 찜찜할 것 같았다. 다친 오른팔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는 경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새 시간이 다 흘렀다. 금메달이었다. 동양인 최초의 82kg급 금메달이었다. 전무했고 지금까지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는 펄쩍 뛰며 포효했다. 그리곤 이내 상대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무한정 고마웠지만 그 역시 고맙다고 했다. 아픈 팔을 공격하지 않아 경기를 끝낼 수 있게 해주어서 여간 고맙지 않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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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우, 1988년 서울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그리고 2023년 협회 수석 부회장

일본은 그를 서울올림픽 MVP로 선정했다. 서른둘의 나이 때문은 아니었다. 핏빛 붕대의 투혼과 결승 상대의 부상을 이용하지 않은 십을 높이 샀다.

올림픽 금메달은 한명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한동안 붕 떠서 다녔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 그 바람에 레슬링을 멀리했고 어쭙잖은 일에도 끼어들었다.

인생의 황금기였으나 방황의 세월이기도 했다. 작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다 큰 것을 찾아 다녔다. 1점을 얻어야 2점을 딸 수 있고 그래야 이긴다. 우리네 삶 또한 마찬가지나 그는 그땐 미처 몰랐다. 삶이 매트보다 더 처절하다는 것을…

레슬링을 아주 떠난 건 아니었다. 코치로, 감독으로, 협회 전무로 그리고 KBS 해설위원으로 늘 곁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마음은 늘 조급했다. 눈앞에 일확천금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정착하기가 힘들었다.

함께 레슬링을 했던 동료들이 몽골에서, 키르기스스탄 정부 등에서 요직을 맡았다. 그들이 사업을 하자고 불렀고 그들처럼 부자가 되려고 부지런히 그들 나라를 오갔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았지만 모두 잡히지 않는 안개였고 뜬구름이었다. 기본을 잃고 떠돈 시간들이었다. 비싼 등록금을 다 버린 뒤에야 깨달았다. 세상 어디에도 한탕은 없었다.

레슬링과도 멀어졌다. 다른 할 일도 많았지만 안팎으로 다툼이 이어져 서로 싸우느라 북새통인 그곳이 싫었다.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레슬링은 피폐해졌다.

레슬링을 일으켜 세운 이건희 회장도 떠났고 삼성도 손을 놓았다. 올림픽 효자 종목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처럼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86년 서울아시안게임,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처럼 자유형, 그레코만형에서 금메달을 10개씩 따며 종합 우승을 한 건 이제 까마득한 전설이 되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림의 떡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몰락 했을까. 시대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랜 내분 탓이 더 컸다. 옛날에 싸워도 국가대표만은 제대로 끌고 갔다. 하지만 최근엔 이것도 저것도 다 무너졌다. 실력 있는 선수들이 나오지 않고 설사 나타났다고 해도 그들을 정상의 무대로 이끌어 줄 선배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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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순환이었죠. 이제 바로 잡아야죠.”

그저 악순환이었다. 레슬링은 10년 이상 겉돌았다. 싸움은 싸움을 낳았고 매트는 자중지란 속에 자멸했다.

최근에도 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선거에서 패한 정치권 인사 때문에 법정 소송이 끝없이 이어졌다. 다행히 이제 겨우 소송이 끝나고 현 회장 체제가 인정을 받았다. 레슬링인들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들 했다.

집행부를 보강하면서 한명우도 부회장으로 들어갔다. 많은 선후배들이 그를 필요로 했고 그 역시 레슬링으로부터 입은 크나큰 은혜를 갚고 싶었다.

“저 한 명 들어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하지만 레슬링은 저의 고향이고 은인입니다. 아주 작은 한 가지 일이라도 도와야 하는 게 옳은 거죠. 제가 레슬링을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우리끼리 싸우는 일부터 없애야겠죠. 그리고 국가대표팀을 제대로 운영해야 합니다. 돈이 좀 필요하고 많이 늦었지만 먹을 것도 없는 데서 서로 먹겠다고 난리 치는 일만 없으면 아직도 희망은 있습니다. 우선 아시안게임부터 다시 시작하면서 올림픽을 내다본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레슬링을 좋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현재 회장님을 열심히 도울 생각입니다.”

대단하진 않지만 이젠 사업체도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들어서 레슬링에 훨씬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다는 한명우 부회장. 모두가 조금씩 뜻을 모으면 분명 달라질 터. 그의 말처럼 레슬링이 합심 단결한다고 해서 옛 영광을 다시 찾기는 심히 어렵다. 현재 거의 바닥까지 내려섰기에 더 내려설 곳도 없지만 뭉치고 조금씩 뜻을 모으면 최소한 지금보다 나빠질 건 없다.

레슬링이 다시 기지개를 켤까.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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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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