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멀고 험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 타고 또 버스 타고 걷고 걸었다. 아무리 산속이라도 그럴 순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산 밑에 들어섰지만 마지막 길이 난감했다. 까마득한 절벽 끝, 다 허물어져 가는 집인지 절인지 알 수 없는 그곳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마음 속엔 희망이 그득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의 친필 현판(유리보전)이 걸렸다는 천삼백 년 고찰 청량사의 주지 스님이 되었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1982년, 지현스님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면 청량산 낭떠러지에 겨우 걸친 청량사 앞에 섰다. ‘삼촌스님’의 손을 잡고 출가, 일주문 앞에서 수없이 서성인 20년 세월의 첫 마중물이었다.
기대 속의 청량사는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법당. 안에서 보니 지붕 사이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요사채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폐사였다. 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원효대사, 의상대사의 대찰이라는 말에 자신이 현혹된 것뿐이었다. 절은 얼마나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지 먼지가 수북하고 ‘주지 임명장’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1년은커녕 한두 달도 머물러있지 못하고 떠나간 흔적들이었다.
그도 역시 떠나야 하는 걸까.
그 밤을 새우고 스님은 캐시밀론 이불 한 채와 쌀 한 말을 지고 다시 산을 올랐다. 산중의 나무, 산새, 바람, 밤 별을 도반 삼아 기도하고 마음을 닦았지만 그가 실제 한 일은 터를 다시 세우고 청량사를 청량사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무문관 수행생활’을 하며 스님은 홀로 법당을 고치고 기약 없는 삽질로 법당과 나란히 있던 요사채를 구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기를 2년여. 처음 원했던 ‘청량산을 터로 잡아 지상 불국토를 건설하려는 서원’ 세우기는 그래도 멀었지만 어느 한 날 산사를 찾은 3명의 교사와 밤새 자리를 같이했다.
그날은 유독 사람이 그리웠던 날이었다. 정성을 다해 그들을 맞이하고 법을 설하자 그들 모두 크게 머리를 끄덕였지만 실은 스님의 수다 한 밤이었다. 그래도 그날의 교사들은 이후 청량사를 잊지않고 찾았고 훗날엔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지금까지 연을 잇고 있다.
그들을 떠나보낸 뒤에 깨달은 바 있었던 스님은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보살행에 나섰다.
대중은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구나
“성직자는 평생 중생과 가까워야 한다.” 스님은 더 이상 산속에 묻혀 있지 않았다. 훌훌 털고 일어나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인근의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며 함께 밭을 갈고 김을 매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과 술래잡기라도 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고 노인들을 만나면 부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름하여 ‘출장법회’였다. 법회는 늘 한밤중에 열렸다.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 공양까지 끝내면 밤 9시는 되어야 모일 수 있었다. 기쁨과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간추려 모은 농촌 생활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처음 한두 명이 좀 지나자 2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모두 경운기를 타고 모여들었다. 올 때는 한명 한명이어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돌아갈 때는 문제였다. 밤 10시가 넘어 한꺼번에 경운기에 시동을 걸면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런 난리가 없었고 더러 시끄럽다며 항의를 했지만 스님은 그 요란한 소리가 부처님 소리보다 듣기 좋았다. 달랑 혼자였던 2년여 스님 생활이 이처럼 시끌벅적해졌으니 세상 천지에 그렇게 대단한 포교가 없었다.
내친 김에 스님도 경운기를 한 대 장만했다. 청량사와 마을을 긴밀하게 잇는 연결고리였다. 어쩌다 경운기에 아이들을 태우고 청량사로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극락 가는 길 같았다. 아이들은 왁자지껄 웃고 떠들었고 경운기를 모는 스님의 입가엔 그만큼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경운기 스님’의 청량사는 그렇게 춥고 컴컴한 겨울을 지나 꽃피고 새우는 봄으로 향해갔다.
어느 봄날 ‘경운기 어린이’ 몇 명이 절을 찾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바빠서 같이 갈 수 없다고 하자 자기들끼리 뜻을 모아 산길을 오른 것이었다. 아침밥 먹자마자 출발, 버스 타고 산 비탈길 걸어서 2시간여 만에 도착했다고 했다.
왜 왔느냐고 했더니 ‘경운기 스님이 보고 싶었고, 절에서 놀고 싶었다’고 했다.
절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천진불’을 보면서 지현 스님은 괜시리 눈물을 흘렸고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지금 동자승 같은 어린이들이 이십 년 후에 이 조계사를 찾아 부처님께 인사하고 다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의 바람대로 그 옛날 경운기 어린이들이 커서 지금은 아이를 데리고 청량사를 찾고 있다. 절을 보면서 자란 그 아이는 별다른 일 없으면 또 절을 찾을 가능성이 높으니 어린이 포교는 긴 세월 장대한 스케줄이지만 그만큼 확실한 것도 없는 듯싶다.
지현스님은 청량사, 조계사 등지에서 어린이 법회를 열고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산사음악회. 대한민국 가장 높은 곳에서 처음 열린 공연 한 마당
음악회를 열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모두 힘들 것이라고들 했다. 그 높은 산 위까지 바쁜 사람들이 왜 올 것이며 누가 공연을 보기 위해 힘든 산행을 할 것이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현스님은 문화의 힘을 알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이어서 더욱 문화 갈증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수롭지도 않은 대중 가수 공연에도 공설운동장을 가득 메울 정도면 잘만하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잘만하면’이 문제였다. 모두 반대하듯 경북의 엄청난 오지 산꼭대기까지 누가 오려고 할 것인가. 어쨌든 한 생각에 매달리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천상의 소리꾼 장사익이었다. 1999년쯤이었으니까 대중들이 좋아하지만 아주 대단할 때는 아니었다.
그에게 ‘어떠느냐’고 했다. 예상대로 ‘곤란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량사까지 올라 온 장사익 씨가 청량사를 보고 무대를 보더니 대뜸 하겠다고 했다. 돈이 없다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2000년 10월, 그가 한영애, 안치환과 함께 왔다.
이름도 생소한 ‘산사 음악회’. 그 밤 청량사에는 3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어느 해 산사음악회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가 합세하여 종교음악제가 되었다. 신부와 수녀, 목사와 신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무대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아우르려는 스님의 정신이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의 가슴 뿌듯하게 만든 밤이었다.
산사 음악회는 지금도 10월 첫 토요일이면 열려 청량산을 빛나는 가을 단풍만큼이나 화려하게 만들고 있다.
다녀간 관객들은 당연히 ‘가을 산 밤 공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무대에 섰던 가수들 역시 대부분 ‘깊은 산 자연의 무대’를 잊지 못하고 다른 기회에 부르면 망설임 없이 달려온다.
가진 것 없던 주지 스님의 원맨쇼였던 음악회는 이제 군과 경북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앞다퉈 지원금을 내놓는 축제 마당이 되었고 그날은 아침부터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부산하다.
자리를 따로 배정하지 않고 내빈을 소개하지 않고 인사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함께 하는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지현스님의 뜻으로 처음부터 만 명 이상이 몰리는 지금까지 지키는 원칙이다.
손님맞이는 신도들의 몫. 그들은 먼 곳에서 찾아온 객들을 위해 청소하고 꾸미고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공연에도 직접 나선다.
둥근소리 어린이 밴드가 흥을 돋우고 남녀 어른 신도들로 구성된 둥근소리합창단이 산사에 어울리는 소리를 들려준다. 스님도 꿈이 있어 아름다운 세상이라며 따뜻한 말로 산사음악회를 연다.
‘외롭지 않은 이 어디 있으며 힘들지 않은 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그렇게 견디며 사는 건 가슴에 품고 있는 희망별 때문이지'
주머니 속의 송곳
2011년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을 맡으라는 전갈이 왔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폐사를 혼자 일으켜 세운 지현스님의 일이 중앙에까지 날아간 탓이었다.
스님은 청량사와 함께 나날을 보낸 신도들과 석별의 날을 보냈다. 아주 떠나는 건 아니지만 조계종 전체의 일을 하다 보면 늘 부대끼던 그들과의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신도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스님의 서울 길을 흔쾌히 배웅했다.
스님은 그렇게 길을 떠날 때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계종엔 많은 인재 스님들이 있으니 그가 매냥 나설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길로 벌써 12년째 서울 조계사와 봉화 청량사를 나들고 있다. 탬플스테이 문화를 도입하는 등 문화사업으로 활동을 넓히고 많은 음악회와 설법 등을 불교와 조계종의 자존감을 높이며 널리 포교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2007년 당시 총무원장이던 법장스님으로부터 복지재단 상임이사직, 그리고 자승스님으로부터 총무부장의 소임을 부여받은 이후 자승, 설정 총무원장 등의 이어진 하명으로 지금까지 8년간 조계사 주지의 소임을 맡고 있다.
조계종단 직영사찰의 주지 소임은 승단 내부에서 귀하게 여기는 소임이다. 그래서 2년이 만기로 아주 오래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를 4번째 연이어 가고 있다.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두고 싶어도 놓아주지 않아 떠날 수 없다.
총무부장과 조계사 주지를 세 차례나 겸직한 그의 변함없는 움직임과 세월 속에 조계사 주변 풍경도 하나씩 하나씩 바뀌기 시작했다. 절터에 인접해 있던 식당과 판매상가, 그리고 우후죽순 들어차 통행이 어려웠던 무허가 설치물들이 모두 사라졌다. 일주문을 가리고 서 있던 건물도 곧 철거된다.
변화는 또 있다.
우정국 광장에서 무시로 벌어지는 무료 급식 행사와 대웅전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각종 연주회와 음악회,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법회와 창작발표회 등이 시시때때로 이어지고 있다
조계사 경내만이 아니다. 안국역 사거리의 종로노인복지센터는 서울 시내 최대 규모의 노인급식 식당을 운영 중이며, 헬스센터와 독서실 등을 넓혀가고 있다.
독거노인들을 위한 식품배달 및 의료 서비스와 집수리 활동은 물론, 경내로 초청하여 벌이는 노인잔치와 장례서비스 등 조계사가 벌이는 복지, 구호 활동의 총량은 지자체 단위를 넘어서는 규모이다.
스님은 이제 사회활동가로도 나섰다. 지난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인 경실련의 공동대표가 되었다. 불교 최초의 NGO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경불련’의 공동대표를 지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민운동이 간단치 않음을 알고 있기에 초대한 자리였다.
함께 하는 나, 함께 하는 세상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나누는 함께 하는 세상. 지현스님의 법어는 ‘함께’다. 일주문에 들어서 지금까지 50여 년 간직했고 그동안 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모두 함께에서 시작되고 함께로 매듭을 맺었다.
스님은 ‘함께는 나로 시작되고 나는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으며 나와 당신이 함께 하여 하나가 될 때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3대가 함께 하는 합창단’을 꾸밀 계획이고 모두가 함께 하는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함께는 행동뿐 아니라 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무리 바빠도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스님은 그러한 바탕 위에서 3권의 책을 집필했다.
세 번째 책.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이다. 바쁠수록 천천히가 필요하다. 느긋하게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면 바쁘지 않아도 된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진심을 담은 칭찬 한마디 한마디는 적금처럼 마음과 복을 키워준다.
“조급해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다림을 가장 좋은 치유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다림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할 수 있는 삶의 지혜야말로 바쁘게만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단비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스님은 스리랑카 지진피해 현장, 난치병 어린이집 등을 방문하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디“이웃과 더불어 서로를 염려해 주고 힘이 되어주는 것이 얼마나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일지를 느꼈습니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일어서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진정한 삶의 힘이란 무엇인가를 배웠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따스한 보살의 미소를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종교인은 서로를 보듬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세보다 서로의 종교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는 수행이 필요할 때이다.
두 번째 책.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도 길은 있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어떤 길을 갈까 하는 고민을 하며 살아가지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 길을, 그 누구도 가보지 않는 길을 개개인은 걸어가는 거지요. 길은 멀지만 가까이 있고 늘 저기 있고, 여기에 있지요. 숨어 있는 어떤 길을 우리는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있을 뿐이지요. 청량사 주지로 있으면서 인생이라는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 용기, 환희심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쓴 글을 모았어요. (불교신문 인용)
첫 책.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은 청량사 찻집 이름이다. 2007년 청량사에서 쓴 책이다.
“사람은 평생 살면서 많은 소리를 만납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고 풍경이 소리를 만나 풍경소리를 만나듯이 말이죠.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며 어떤 만남의 소리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요. 수많은 만남을 좋은 인연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선 좋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음 책. 심우실에서 띄우는 편지
SNS를 통해 서울과 청량사에서 틈나는 대로 띄운 편지들이 꽤 많이 쌓였다.
백 서른한 번째.
매화 소식에 가슴이 설렙니다.
동박꽃 향기로 산새들의 날갯짓이 활기를 되찾습니다.
두견새는 진달래꽃 피었다고 하루 종일 노래합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백 마흔한 번째
여러분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연습해 보시길 바랍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바로 볼 줄 알면
우리 마음은 항상 봄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견지동에서 지현
백 마흔 번째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세배를 받았습니다.
스님께 세배한다고 예쁘고 멋지게 꾸미고 온 어린이 청소년 불자들입니다.
주말마다 법회를 하기 위해 절에 모이는 아이들을 보면 참 기특하고 행복합니다.
2022년 12월 송년
아침을 휘파람으로 시작하는 사람과 한숨으로 시작하는 사람 중에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실 것입니까.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거 자체가 행복일 텐데.
지현스님은 조계사에서도 늘 새벽 만행을 한다. 청량사의 깔끔하고 여유로운 그것과는 사물 다르지만 도심 만행도 나름의 깨달음이 있다. 1시간 30분여 남대문, 창경궁 등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조계사로 돌아와 대중들과 마당을 쓸며 소통한다. 조계사 마당을 개방하고 밤 11시까지 등을 켜놓아 조계사를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현스님은 법종스님을 은사로 1971년 수계했다. 청량사 회주이면서 조계사 4만기 주지이다. 조계종 총무부장,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역사문화조성추진위총도감, 사회복지재단상임이사와 경불련 공동대표, 경실련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거나 현재 맡고 있다.
스님생활 반세기를 넘긴 바른 수도승이자 뛰어난 행정승으로 2000년에는 조계종 포교대상을 받기도 했다.[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