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3] 60대 후반 노장, 윤진구 KBL 패밀리 부회장이 아직도 코트에서 뛰는 이유
김학수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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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31 13:16
‘날렵한 배불뚝이'. 1980년대 초반 실업 농구선수로 활약할 때 동아일보 농구담당 최화경 기자가 붙여준 이 별명을 아직까지 좋아하며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생활체육 코트를 현역선수처럼 휘젓고 다닌다. 별명은 당시 농구대잔치에서 배가 불쑥 나온 선수가 전후반 풀게임을 뛰어다닌 그를 보고 팬들이 웃음과 사랑을 주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갈비뼈가 수십번 골절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직도 농구가 좋아 코트를 떠나지 않는다.
지난 19일 제기동 경동시장 내 돼지불백전문 식당에서 만난 윤진구(66) KBL 패밀리 부회장은 52년의 농구 삶을 살고서도 아직도 현역 선수 때 못지않은 열정과 집념을 보인다. 오랜 인생 무대에서 판을 몇 번 바꿀 만도 한데, 그는 올곧이 서서 농구를 떠나지 않았다. 실업 선수를 은퇴하고 나서도 생활체육으로 농구를 계속하며 현재까지 이른 것이다.
그는 평소 말이 매우 빠르고 성격도 직설적이다. 선배든 후배든 싫은 것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속사포 같은 말투로 바로 쏟아낸다. 그래서 농구 선후배들 사이에 ‘호불호’가 많이 엇갈린다. 좋아하는 이들은 솔직 담백하다고 하며, 꺼리는 이들은 너무 말이 많다고 거리감을 두기도 한다.
오랫동안 그와 코트에서 맞붙기도 했던 임정명 전 농구 국가대표는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이다. 올해부터 한국프로농구에서 활약했던 관계자들의 친선모임인 KBL패밀리를 이끌게 된 임정명 회장은 “진구 형은 솔직담백하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 때문에 고집이 세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며 “의리가 많고 잔정도 많아 인간미가 있는 멋진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농생농사(籠生籠死), 농구에 살고 농구에 죽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농구에 살고 농구에 죽는다“는 것이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미국 농구에서 경기중에 죽은 농구 선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가 가장 멋진 농구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동대문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학교 농구코치가 큰 키(1m79)를 보고 농구를 권유해 시작한 이후 벌써 52년째가 됐지만 아직도 농구공을 놓지 않고 있다. 배재고, 중앙대, 한국은행에서 센터로 활약했던 그는 1m92, 95kg의 거구이다. 하지만 지금도 웬만한 50대 나이의 생활체육 선수들에 결코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준다. 리딩형 센터. 골 밑 중앙에서 선수들의 전반적인 플레이를 이끌어나간다. 백코트, 러닝, 순발력과 체력은 다소 부치기는 하지만 웬만한 경기에선 주전에서 빠지지 않고 뛴다.
이 때문에 그를 부르는 곳이 많다. 생활체육 선수로 2000년 전반 ‘파랑새농구단’ 멤버로 뛰기 시작한 그는 국내는 물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국제 생활체육농구대회에도 출전한다. 그동안 여러 번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아버지 농구팀'이라는 이름으로 의사, 국제보험 전문가, 클럽 코치 등 생활체육 농구팀 멤버들의 면면이 다양하지만 선수 출신으로 쭉 한 길을 걸은 그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국내 최장신 센터였던 기아농구단의 한기범과 한 팀을 이뤄 동남아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윤진구 씨는 “코트를 뛰다 보면 온갖 잡념을 잊을 수 있다. 오로지 공 하나를 보고 열심히 뛰고 땀 흘리는 것이 좋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서로 격려하며 맥주 뒤풀이 등을 하며 인간적인 교류를 한다”며 “농구가 오늘날까지 나를 뒷받침해 준 것에 매우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고 했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1990년대 후반, 한국은행 안동지점 책임자로 발령 난 그는 모처럼 평생 가난한 삶을 보냈던 노모 박정희 여사(2013년 작고)를 안동 관사에 모셔 함께 생활을 한 것을 30여 년 가깝게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88년 한국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그는 3년 뒤 은행 대리시험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은행에서 농구선수로서의 적극성과 집중력을 인정받고, 대리 시험까지 패스한 그는 안동지점 책임자로 있다가 1998년 명퇴를 신청, 2억6천만원 명퇴금을 받고 한국은행을 떠났다.
홀어머니는 외아들인 그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 청계천 철거민촌 성남과 후암동 해방촌 단칸방을 전전하며 힘든 삶을 살았다.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주위로부터 듣지 않기 위해 ‘사랑의 매질’을 하며 키웠다는 것이다.
그는 농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2번 어머니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한다. 한 번은 중앙대 선수 시절 싸움판이 생겨 경찰서에 연행돼 어머니가 달려오게 했다. 두 번째는 1982년 12월 대통령배쟁탈 전국남녀농구대회 경기장 폭력 사건이다. 한국은행 소속이었던 그는 기업은행과의 경기에서 리바운드를 다투던 상대편 임기열의 얼굴을 주먹으로 두 차례 심하게 때려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히며 경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1986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경기장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일벌백계’로 다스리던 때였다. 그는 농구계의 적극적인 구명운동과 개인 사과 등으로 폭력행위혐의로 구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났다. 대한농구협회로부터 출전정지 징계를 받고 상당 기간 자숙하는 기간을 거친 끝에 다시 선수 생활을 하게 됐다.
가진 것 없는 집안 형편에 농구를 하면서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고 최고의 직장 생활까지 한 것에 대해 지금도 너무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그는 “우리 시절 많은 이들이 가난했지만 우리 집안은 정말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청소년기에 자칫하면 극도의 반항 의식으로 사회에 불만을 갖고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농구 선수를 하면서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고 한국은행이라는 최고의 직장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중앙대 입학할 때 정봉섭 감독(전 대학농구연맹 회장)이 학교 앞 양복점에서 처음 양복을 맞춰 입으면서 사회의 따뜻한 맛을 느꼈다고 한다. 또 대학 졸업반 무렵, 실업 드래프트로 삼성과 한국은행에서 줄다리기를 하다 결국 한국은행을 선택하면서 20여 년간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을 해 가정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시작한 농구의 삶
그는 지난 10년간 방과 후 강사로 봉사했던 서울 삼육중 농구팀을 얼마 전에 그만뒀다.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농구를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주위 동료들이나 후배들은 선수 때 다친 몸 등으로 코트에 나서기가 어렵지만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 크게 아픈 곳이 없다. 그래서 젊은 생활체육 선수들과 경기를 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좋은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고 맛있는 것 먹고 지내는 생활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는데 딸을 자신의 뒤를 이어 농구선수를 하도록 했다. 딸은 윤서영. 은광여중고, 수원대를 거쳐 프로선수를 하다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현재는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