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4] [박주현의 산행수필] 현충일에 오른 북한산..... 춤, 오르되브르(애피타이저), 생일파티
김학수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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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4 10:31
인간만큼 '악랄(惡辣)한' 동물이 있을까요? 고문은 인간들이 생겨난 이래 모든 나라에서 당연지사로 등장한다. 그 이름도 다양해서 아르헨티나에서는'춤', 그리스에서는 '오르되브르'(애피타이저), 필리핀에서는 '생일파티'로 불렸다.
시대적 배경과 권력의 차이는 크겠지만, 사육신의 의지가 세조에 의해 억압되었다면 현대인들 역시 생계와 사회의 규제에 의해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윗대의 열사 중에서 사육신, 엄흥도, 단종을 집중적으로 그린 화가 서용선을 통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화두삼아 구기터널을 들머리하여, 향적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 대남문,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동장대, 용암문, 노적봉, 용암봉, 만경대, 백운봉암문, 백운대, 인수봉, 영봉, 육모정공원지킴터를 날머리로 하는 9시간 현충일 기념 산행을 한다.
구기터널에서 하차하여 향적봉으로 향하는 길은 '으아리'들의 세상이다. '으아리' 효능으로는 풍을 없애 주며 허리와 무릎이 시리고 아플 때 효과가 좋고 경락이 막힌 곳을 풀어주며 순환이 잘 되게 하여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작용이 있어 풍이나 습으로 몸이 아프고 쑤신 증상을 치료하는데 좋다고 한다. 예로부터 고문당하고 난 후에 민초들이 애용하는 식물이다. 앞에 우뚝 솟은 향적봉 오르는 것도 숨이 턱하니 막히는데, 곳곳에 무더기 덩굴로 흰꽃을 피우고 있는 '으아리'보니 가슴까지 애려온다.
향적봉은 출입통제되어 우회하여 정상에 오르니 현충일 묵념 사이렌이 울리고 잠시 순국선열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니 비로소 조금 마음 한 켠이 열린다. 비봉, 사모바위를 지나 승가봉(僧伽峰)에 우뚝 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밀집된 아파트가 펼쳐져있다. 몇몇 '악랄(惡辣)한' 인간들이 그곳에서 들키지 않으려고 꼭꼭 숨어 살고 있다. 낑낑되며 문수봉에 올라 문수보살(文殊菩薩께 '악랄한' 인간 솎아내기 부탁하니 '주현'이 먼져 끌어 올린다. 대남문 지나니 배고파 그냥 주저앉어 막걸리, 라면,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주현'이는 육욕의 악랄한 추종자다. 비참하다. 아무생각 없이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동장대, 용암문까지 걸어본다.
노적봉을 지나 용암봉 아래를 지나면서 원효봉을 내려다 보니 제정신이 돌아온다. 간신히 정신 수습하고 백운대에 오른다. 칙칙폭폭 굉음을 내며 앞만 내리 달리는기관차 인수봉과 마주 앉은 '악랄한' 주현이는 다시 한번 비참해 진다. 신념도 없이, 줏대는 어디다 파묻어 버리고 육욕에 이끌려 다니는 모습이 애처롭다. 불쌍하다. 서둘러 하산길에 나서고 싶을 뿐이다. 원래 '주현'이는 태어나면서 맑고 깨끗한, 영롱한 정신이 하찮은 몸을 잠시 빌려왔을 뿐인데 나이들면서 주객이 완전히 뒤바껴 있다. '주현'이의 정신은 도대체 어디에 쑤셔 박혀있을까?
몸을 지치게 하면 정신이 좀 더 제자리에 올까하여 하루재에서 영봉으로 다시 산을 오른다. 두 분의 스님과 조우하며 '성불하시라'고 인사를 드리니 나에게도 '성불하라'고 한다. 아 참 괴로워 죽겠다. 물도 떨어지고 가져온 참외도 다 먹어버렸다. 날도 덥고 땀을 넘 흘린 탓인지 갈증이 심하다. 늦은 시간에 올라오는 산객의 배낭 옆주머니에 캔맥주가 끼여있다. 말도 필요 없이 하산하면 캔맥주 원샷하리라 하고 본초적인 생각만 한다. 육모정 샘터에서 두 바가지 연거푸 원샷으로 겨우 사람다움을 찾는다. 나 같은 놈은 조그만 굶기던가 생물학적인 약간의 고통을 주기만 하면 쉽게 변절하고 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고고한 척, 잘난 척 하는 놈이었는데 고작 이 정도 였을 줄이야...... 한심하다!!!!!
서양화가 서용선의 그림 <심문, 노량진, 매월당>은 고문을 다룬 그림이다. 서용선은 이 그림을 세 개의 화면으로 나누어 그렸다. 왼편에서는 심문을 받는 두 인물, 오른쪽 위편은 노량진 강가에 시신이 되어 누운 사육신,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그들의 시신을 수습한 매월당 김시습의 얼굴이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데 회화에서는 다소 과감하다고 할 수 있는 방식이다. 다른 장르인 문학의 성격을 도입하는 것은 회화의 순수성과 반한다고 여겨져 미술사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문학가'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하다고 밝히는 서용선은 생각이 달랐다. 현대 미술 역시 작가 개인의 감각이나 체험, 그리고 교양이 결합된 지적인 작업이므로 순수/비순수, 문학/비문학의 구분은 더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세 개의 화면에서 심문을 받는 두 인물을 묘사한 '고문'편이 우리의 마음을 후벼판다. 화면 속에 묶여 있는 당신은 박팽년일지도 모른다. 이제 마흔이 된 당신은 단종을 복위하려고 했던 이유로 세조 앞에 붙들려 앉아 고문을 받는 중이다. 늘 침착하고, 하루 종일 의관을 벗지 않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당신은 옷이 흐트러지고 맨살이 보일 때마다 수치심을 느낀다. 아찔한 고통 속에 떨어질 때 13년 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순간이 스쳐 지나간다. 학문, 문장, 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렀던 당신은 사랑방 책 속에 넣어둔, 완성하지 못한 글을 떠올린다. 죽음의 순간이 임박해올 때마다 자신처럼 죽어갈 자식과 며느리의 뱃속에 있는 아기 얼굴이 보이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당신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죽는 것을 목표로 할 수 밖에 없었던 1456년 6월 2일의 일이었다. 경붕궁 사정전 앞 외롭고도 쓸쓸한 당신의 이야기가 수백 년이 넘도록 진부해진 적이 없었다.
왕위를 빼앗긴 어린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캔버스 속엔 그들 중 두명이 의자에 묶여있는데 개인적으로 사육신 중에서 박팽년의 이름이 제일 먼져 떠오른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아꼈기에 몰래 사람을 보내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사실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박팽년은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조가 어찌 나를 배신하냐며 발을 굴렀다고 하는데 화면 속에서도 검붉은 흙빛으로 익어버린 그의 얼굴이 보인다. 눈, 코, 입이 지워질 정도로 분노가 지배한 얼굴은 심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 더 잔혹해질 것을 암시한다. 게다가 우리는 "지지는 쇠가 너무 차가우니 더 달구어 오라"고 했던 박팽년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진압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으며 결국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 235년이 흐른 뒤 숙종은 사육신의 시신을 버렸던 노량진 부근에 사당을 세우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신하가 절의(節義)에 죽는 것보다 더 하기 어려운 것도 없으며, 사육신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세조의 성덕을 빛내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왕(단종)을 죽인 왕(세조)을 자신의 선조로 모시는 동시에, 충과 효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조선의 왕이 겪었던 모순이었다.
당대의 백성들이 단종을 배신한 신숙주를 떠올리며 금세 맛이 변하는 녹두 나물을 '숙주'라 이름 붙였던 것처럼. 충 효라는 유교 관념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온 우리조차 세조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육신에게 행해진 고문때문일 것이다. 마차에 팔다리를 묶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 )과 달군 쇠로 팔다리를 끊어내는 모진 고문을 행한 것도 모자라 그들의 아들을 죽였으며 부인과 딸을 노비로 만들었다.
세조는 그렇게 해서 얻은 왕위에 겨우 13년간 머물렀으며,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급사했으며,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도 왕위에 즉위한지 1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사람들은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저주라고 수군거렸다.
사육신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입장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다음 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지 4개월 만에 목숨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