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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4] 스포츠 스토리/ 세월부대인

이신재 | 2023-12-04 10:21
박찬호 ⓒ유튜브 채널 sy P 캡처이미지 확대보기
박찬호 ⓒ유튜브 채널 sy P 캡처
3. 즐풍목우(櫛風沐雨)

박찬호의 행운의 다저스행에는 손경수가 있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운명은 얄궂게도 그렇게 흘러갔다.

1991년 8월 손경수는 임선동, 조성민과 함께 한.미.일 친선고교대회 대표로 뽑혔다. 그러나 손은 결국 탈락했다. 홍익대행을 결정하고서도 서울 연고 프로야구팀 LG, OB와도 계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야구협회는 프로야구계와 선수들에게 일침을 놓기 위해 미국 출발 직전 3중 계약의 손경수를 제외시켰다. 대신 그 자리에 박찬호를 집어넣었다. 박을 추천한 이는 한양대 이종락부장. 박을 탐내고 있는 대학이었지만 실력상 별 하자가 없었기에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찬호의 기용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아무래도 쌍두마차인 조성민과 임선동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 둘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다. 덕분에 박찬호는 4게임 중 3게임에 나설 수 있었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그의 빠른 공을 눈 여겨 보았다.

국내의 평가는 ‘그저 공만 빠를 뿐‘이었다. 어느 타자가 한 이야기가 있다.

“박찬호요. 무지무지하게 빠르죠. 그런데 안치면 돼요. 대부분 볼이거든요.”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컨트롤은 훈련을 통해 가다듬을 수 있지만 빠른 공은 타고 난다고 보았다.

박찬호는 여기서 훗날 메이저리그행의 강력한 협력자가 된 스티브 김을 만났다.

2년 후.

다저스는 버팔로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한 박찬호를 보며 확신을 가졌다. 그리곤 학생신분이며 아직 군대를 마치지 않은 그를 ‘유학’이라는 편법을 사용하며 스카우트했다.

다저스의 철저한 전략 끝에 일약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 한국인 팬을 잡으려는 다저스의 상술 등에 힘입어 꿈의 마운드로 직행했지만 그 마운드는 높고 높았다.

정민철은 하루가 다르게 뻗어 나갔다. 92년 시즌 초의 마운드는 불안했다. 코칭스탭이 기대를 걸고 올렸지만 아직은 덜 익은 풋사과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빨리 1군 마운드에 오른 게 기폭제가 되었다.

자나 깨나 야구밖에 없었다. 코치진의 지시를 철저하게 실천했다. 10개를 연습하라고 하면 100개를 던졌다. 스스로를 믿는 느긋한 마음과 보통사람보다 한 뼘이나 더 긴 팔도 한몫했고 던지면서 요령도 익혔다.

쌓이고 쌓인 훈련이 마침내 빛을 발휘했다. 고비 넘기가 힘들었지 일단 한 고비를 넘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야구가 확실하게 보이고 마운드에 서면 자신감이 생겼다. 어느 날에는 타자들의 타격이 슬로우비디오처럼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신바람을 탄 그의 마운드는 거칠 것이 없었다. 93년 14승을 올리며 에이스급으로 올라선 후 내리 8년간을 10승 이상 기록했다.

한창때의 정민철을 보면서 선동열은 ‘내 뒤를 이을만한 재목’이라고 칭찬했다. 타격의 달인 이종범도 ‘최고의 직구’라고 했고 포수 박경완은 ‘받아 본 공 중 최고’다고 했다.

최창양은 마이너리그에서 1년 여간 몸을 굴렸다. 큰 뜻을 품고 많은 걸 담기위해 노력했지만 메이저리그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머릿속이 복잡할 즈음 삼성이 찾았다. 입학 동기들이 프로행을 앞둔 95년 말 역대 신인 최고액인 5억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삼성은 규약을 교묘하게 활용, 롯데 연고의 최창양을 품에 안았다.

박찬호가 메이저 마운드에 섰다. 대단한 센세이션, 그러나 일장춘몽이었다.

빠른 공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100마일의 공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들쭉날쭉하는 공은 잡히지 않았다. 그에게도. 팀에게도 늘 불안한 마운드였다. 짐을 쌌다. 젖과 꿀 대신 마른 빵과 아픔을 씹어야 하는 마이너리그.

실망이 컸지만 박찬호에겐 그것이 시작이었다. 숙소까지의 10km를 매일 뛰어 다녔다. 기약 없는 세월이었지만 박찬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훈련은 희망이고 고통은 꿈 이었다.

다저스의 투수조련사들도 그의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 한 3년 그렇게 죽을 정도로 보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었다.

말을 배우고 공을 배우고 정신을 다잡는 숙련의 시간들이 정신없이 흘렀다.

4. 고해중생(苦海衆生)

야구공의 실밥은 108올이다.

108개의 실 매듭이 이어져 한 개의 공을 만든다. 그 실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공은 휘어지기도 하고 꺾이기도 하고 바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야말로 변화무쌍. 백팔번뇌와 다르지 않다.

고해의 마운드.

괴로움의 바다(苦海)는 끝내 닿을 언덕이 없으니(終無岸) 시름의 성(愁城)을 어찌 쉽게 공략할 수 있겠는가(豈易功). 공 하나에 승리가, 공 하나에 인생이 걸렸다. 겉보기엔 그저 그럴지 몰라도 그들이 뿌린 수많은 공에선 조금씩 번뇌가 묻어났다.

10인의 투수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각자의 마운드를 꾸렸다. 한바탕 바람이 불었지만 그래도 대학 4년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졸업과 함께 다시 맞이하게 된 선택의 기로.

예년의 경우라면 어느 프로구단으로 가느냐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졸업을 앞둔 그 해엔 변수가 있었다.

임선동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 캡처이미지 확대보기
임선동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 캡처


첫 번째가 현대의 아마추어 팀 창단.

대통령선거에 나섰다가 낭패를 본 정주영회장이 느닷없이 스포츠 팀 육성을 지시하며 프로야구팀 창단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그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로야구단 설립 때만 해도 ‘제발 맡아 달라’며 애원했고 그 후로도 팀 인수를 권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한다고 해서 그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방법을 모색하던 현대는 팀 만들기가 여의치 않자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고 실업팀을 만들면서 대어들을 싹쓸이했다. 현대가 내세운 올림픽출전 명분과 거액의 입단 보상금은 선수들이 솔깃할 만 했다.

임선동도 분위기에 휩쓸려 7억 원에 덜컥 입단 계약을 맺었다.

두 번째는 해외진출.

박찬호가 바람을 일으켰고 미, 일 프로구단들을 손길을 뻗치고 있어 실력과는 별도로 너도나도 바다 건너를 기웃거렸다.

LG가 마뜩찮아 현대의 손을 잡았던 임선동은 또 다른 기회를 잡았다. 일본 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였다. 계약금 1억5천만원(약 15억원), 연봉 1천2백만엔(약 1억2천만원)에 8년 장기 계약이었다. 혹 할 만한 조건이었지만 기회가 아니고 족쇄였다.

임은 LG는 무시할 수 있고 현대는 적당히 물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로구단의 지명권이 옳은 것이 아니고 노예계약에 가까운 불평등계약이지만 자기들만의 성을 지키려는 기득권층을 떼로 상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LG는 지명권을 내세워 임선동의 발목을 잡았다. 다이에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일프로야구협정 때문에 임선동이 스스로 문제를 풀지 못하면 데려 갈 수 없었다.

지루한 법정싸움이 시작되었다. 임선동은 결국 이겼다. 법이 불평등계약임을 인정했다. LG와의 다툼으로 한국과 일본의 어느 마운드에도 서지 못했던 그 세월을 보상받고자 했지만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싸움에선 이겼지만 다이에는 한국 측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길이 막혀버린 임선동은 ‘죽어도 싫은’ LG를 마다하고 현대 피닉스에 몸을 얹었다. 그리곤 태극마크를 달고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했다.

조성민은 훨훨 날았다. 프로구단에 얽매이지 않았던 그는 박찬호를 보면서 해외진출 계획을 세웠다. 국내 프로구단들이 손을 내밀기 전 이미 일본 프로야구의 최고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일찌감치 계약을 체결했다.

잘 난 동기를 옆에 둔 덕분에 차명주 등은 어부지리했다.

프로구단들은 대어가 빠져나간 자리를 준척으로라도 메우기 위해 거금을 뿌렸다. 미국에서 돌아와 조금 일찍 프로 전선에 나선 최창양의 5억원이 기준선이 되었다. 차명주가 5억원에 롯데, 손혁이 4억원, 이정길이 3억8천만원에 LG로 향했다.

4년전 프로마운드에 올라 성공시대를 열었던 정민철, 염종석을 감안하면 이들은 신인 첫 해15승 정도는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러지 못했고 사상 최고의 몸값 인플레이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들을 생각하면 정민철 등은 중간보너스로 몇 억씩 받아야 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제 멋대로일 때가 있다.

이제 2라운드 싸움. 이들의 마운드 무게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박찬호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었다.

조성민은 희망의 땅에 들어섰다.

임선동은 법정에서 싸워야 할 판이었다.

정민철은 꾸준한 활약으로 연봉 1억원에 다가섰다.

최창양은 미국에서 배운 공 덕분에 기대주 평가를 받았다.

손혁은 공주고 에이스 시절을 꿈꾸며 재역전의 의지를 다졌다.

차명주는 몸값을 하기 위해 착실하게 몸을 만들었다.

염종석은 부상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정길은 전훈지에서 부상을 입어 개문휴업을 할 판이었다.

그러나 손경수는 이 대열에 끼지 못했다.

1996년의 아침은 그렇게 밝았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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