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생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렸다. 그의 나비와 꽃은 그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색깔과 모습이 다양하고 창의적이다.
그에게 나비는 무엇이고 꽃은 무엇일까.
희망이고 기다림이고 즐거움이고 설레임이다. 한마디로 신명나는 축제이다.
나비 그림의 대가 한국화가 곽석손. 아류작이 없지 않지만 그의 그림을 한 두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그것이 어느 곳에 있어도 그의 그림임을 단번에 알아 본다.
화려한 색채, 깊이 있는 내용, 춤추는 날개 짓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꽃밭을 노니는 나비. 이제는 브랜드가 되어버렸지만 그도 젊어 한때엔 비구상 작품을 그렸다. 탑이 테마였고 어떤 물체가 쌓여 있는 형상들의 추상화적 동양화였다.
비교적 생소한 느낌의 작품들로 그런 세월 속에서 나비가 자라고 자라 훨훨 날아다니게 되었다.
곽화백은 홍익대 재학시절 천경자, 박생광 등으로부터 전통 채색화 기법을 배웠고 그 기법을 고수하며 전통적인 재료만을 활용, 한국 채색화의 한 축을 세웠다.
곽화백은 어떻게 ‘나비와 꽃’을 그리게 되었을까.
“어느 날 문득 어릴 때 본 나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나비들을 보면서 자유를 느꼈던 기억이 되살아났죠.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린 꽃과 나비들이 저마다 즐겁게 날아다닌 듯 했습니다. 같은 나비고 꽃 같지만 모두 스스로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꿈 속의 나비가 나인지 내가 꿈속의 나비인지 잘 모르겠다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깨달음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정말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나비라고 생각하면 나비의 느낌대로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즐거워 진다.
그래서 작품 제목은 흔히 ‘축제’인데 그의 점잖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이다.
미술계 정화에 나섰던 미협 이사장
곽화백은 평생 한국 채색화의 맥을 이으며 일가를 이루었지만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자신의 적성과는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계의 혼탁함 때문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선거전에 뛰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방 대학 교수(군산대학)가 중앙 조직의 장이 되는 일이 결코 쉬울 때가 아니었으나 미술계를 정화하기 위해 결단했고 그의 성품을 잘 아는 많은 미술인들의 지지 속에 압도적인 표 차로 이사장이 되었다. 2001년 쯤이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이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미술계의 비리가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 될 때 였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선거전에 뛰어 들었죠. 원하는 모든 일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미술대전만은 투명하고 공정하게 치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군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미협이사장, 국전 심사위원 서예대전 심사위원 등으로 한없이 바빴던 50였지만 곽석손 화백은 어느 한 시도 붓을 멀리 하지 않았다. 늘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기며 70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는 변함없이 화폭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직도 미완성의 아쉬움에 더러 한탄한다고 하지만 40여년째 꽃밭을 훨훨 날고 있는 수백, 수천마리의 나비들은 곳곳에서 자유로운 날개 짓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윤회의 철학을 일깨워주고 있다.
몰아(沒我)와 합일(合一)의 나비와 꽃/김순옥(서양화가. 박사. 한국미술진흥원 원장)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고 했던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 속을 날아다니며 유희하던 장자가 꿈에서 깨어났다. 장자는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자신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장자적 세계관에서 꿈과 현실, 아(我)와 피(彼)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꽃과 나비와 인간은 서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합일(合一)된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곽석손 화백의 그림을 보다 보면 어느 덧 우리 자신이 나비가 되어 꽃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듯한 몰아(沒我)의 경지를 느끼게 된다. 비슷한 크기의 꽃잎들이 빽빽하게 반복되고 있는 평면적 구성은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화폭의 절대적 크기에 제한되지 않는 무한한 공간을 내포한다. 이를 통해 온통 세상이 꽃으로 충만해 있고 나비 역시 꽃의 일부가 된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곽석손 화백은 왜 나비를 그리게 된 걸까? 나비를 통해서 그가 표출하고 싶었던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까?
“꽃을 찾는 나비의 마음을 상상하면 설렘과 흥분을 느낍니다. 그 행복한 순간을 화폭에 담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오래전 곽석손 화백의 초대개인전이 경향갤러리에서는 열렸었다. 곽 화백이 공 들인 그림이 달디 단 열매가 되어 넓은 전시장을 가득 채워 신비한 향을 발하고 있었다.
초대된 사람들 하나하나의 표정에서 이미 형형색색의 나비가 되어 꽃 속을 헤매고 있는 무아지경의 행복감이 읽혀졌다.
“사실 너무 오랫동안 집착했던 공격적인 공간 구축이나 대립적인 색면(色面)의 무게감은 실험의 흔적이 너무 짙었어요. 실험의 흔적으로 얼룩진 충돌의 공간에 갇혀 자연을 그리고자 하면서도 자연의 세계를 마음 속 깊이 느끼지 못했죠. 내 안에서 조차 정화되지 못한 채 거듭되는 반복만으로 상대방의 미적인 정감을 강요하는 작업에서 이제는 스스로 벗어나고자 합니다.”
보는 이들과의 공감... 그것은 곽석손 화백이 오랜 구도(求道)와 탁마(琢磨)의 과정을 거쳐 돌아 온 결론이었다.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무거운 짐을 내리고 그리는 이나 보는 이들이나 볕 좋은 봄날 나들이 가듯 마음과 마음의 소통을 이루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것은 타협이 아니었다. 대가(大家)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요, 단순함의 미학이었다.
그의 작품 배경이 되는 꽃이 초기에는 여러 가지 화려한 색으로 표현되었지만 최근에는 같은 계열의 색상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위를 날아가는 나비의 색이 더욱 돋보이고 바탕에 깔려있는 평면위의 나비가 입체적으로 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곽석손 화백은 가장 전통적인 재료를 통해 가장 현대적인 표현을 시도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그만의 조형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한 없이 고민하고 수 없이 생각 합니다” 곽석손 화백은 창작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작품의 깊이는 들인 공과 비례합니다. 공이 적게 들어간 작품은 깊이감이 없고 보는 이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창작의 고통이라 했던가. 나비가 될 때 누에가 허물을 벗는 고통처럼 그의 고통 속에 탄생되는 나비는 오늘도 화려한 빛으로 꽃나무 숲을 날아오르고 있다.
곽석손화백
1948년 대구
1972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학사
198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역임
국립군산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역임
대한민국 회화대전 운영위원장
전북 도립미술관운영 자문위원
국가 보훈문화예술협회 자문위원
대한민국 신조형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개인전 50회 (서울, 대구, 군산, 에쿠아돌 등)
제 8회 인도 트리엔날 (뉴델리 국립미술관, 인도)
한,터키 현대 미술교류전 (미마르시난대학교 미술관)
MANIF 서울 국제 아트페어 (예술의 전당 미술관)
서울시 중진 원로 작가 초대전 (서울시립미술관)
국제 채묵화 연맹전 (대만, 대중시립미술관)
한국화 그 전통과 정신전 (롯데미술관, 서울)
당대 한.중 대표작가 연합전 (세종문화회관 전시실)
한국 현대 미술제 (예술의 전당 미술관)
뉴욕 아트페어 (뉴욕 컨벤션센터)
동북아시아 아트 페스티벌 (세종문화회관 전시실)
PDAF 한국, 스페인 현대 미술제 (말라가 미술관, 스페인)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