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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4] [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이야기] 벙커와 해저드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학수 편집국장 | 2023-12-04 10:18
빗물 고인 골프장 벙커. [KLPGA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빗물 고인 골프장 벙커. [KLPGA 제공]
아무리 골프를 잘 치는 프로골퍼라도 벙커나 해저드만 보면 긴장을 한다. 거기에 빠지면 한 타 이상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스트레스까지 받는다. 아마추어 골퍼들은 벙커와 해저드를 피하기 위해 약간 다른 방향으로 틀어 때려도 마치 기다렸다는듯 볼이 그쪽으로 날아간 경험들을 갖고 있다. 마치 파란만장한 롤로코스터 같은 인생 역정을 보내는 것처럼 벙커와 해저드 같은 위험요인들을 잘 이겨내면 그만큼 원숙한 실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 골프의 매력이기도 하다.

오래전 언론에 보도됐던 내용이다. 32년 전인 74년 브리티시오픈 최종 라운드. ‘황금곰’ 잭 니클로스는 15번홀에서 친 어프로치샷이 짧아 볼을 벙커에 빠뜨리고 말았다. 니클로스는 깊은 항아리 벙커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볼은 오히려 벙커 벽에 맞고 니클로스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모래와 잔디조각, 작은 암석 부스러기들도 함께 튕겼고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머리를 숙였다. 바로 다음 순간 뭔가가 그의 어깨에 부딪쳤다. 곧 경기위원이 다가왔고 니클로스는 “볼이 내 몸에 맞았느냐”고 물었다. 경기위원은 “아니다. 볼은 자네 머리 위로 날았고 몸에 맞지 않았네”라고 했다. 경기를 마친 니클로스는 스코어 카드에 사인을 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경기위원에게 확인했으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 볼이 니클로스 몸에 맞았다면 2벌타를 부과받아야 했다. 이날 71타를 친 니클로스는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러나 32년이 흐른 지금도 니클로스는 당시의 일 때문에 종종 괴로워한다고 한다. 니클로스는 “경기위원은 아니라고 했지만 볼이 내 몸에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나는 그날 잘못된 스코어를 적어낸 것이다. 지금도 괴롭다”고 했다. 벙커가 니클로스에게 평생 지을 수 없는 아픈 상처를 주었던 셈이다.

벙커라는 말은 통상 군사적인 용어로 쓴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라면 벙커 진지작업을 해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사람과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하에 설치한 군사요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1945년 독일 항복 직전 지하벙커에서 애인 애바 브라운과 최후의 죽음을 맞았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역사 교과서에서 ‘벙커’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했다.

온라인 영어어원사전(OED)에 따르면 벙커라는 단어는 스코틀랜드어로 1758년에 ‘벤치’, ‘좌석’ 또는 짧은 2층 ‘잠자리’를 뜻하는 것에서 유래됐다. 이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처음 나왔다고 한다. 스웨덴 고어에서 ‘번케(bunke)'는 '선박의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배'를 의미했다. 19세기에 주택의 석탄 매장이나 배의 갑판 아래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됐다.

벙커라는 말이 골프에서 쓰이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스코틀랜트 초기 골프역사와 관계가 있다. 이 코너 32회 ‘페어웨이’에 대한 설명에서 얘기했듯이 골프는 바닷가에 가까운 링크스에서 발달했다. 코스를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지는 작은 강이 흐르고 강 주위에 모래가 많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래가 많은 지역을 벙커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모래 벙커는 다른 어떤 스포츠에서도 없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

벙커라는 단어 자체의 어원은 16세기 스코틀랜드어 '본카르'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와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잦은 교류를 한 스칸디나비어의 ‘번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골프에서 벙커라는 단어는 1812년 왕립 골프 규칙에서 처음 등장한다.

해저드에서 볼 찾는 골퍼. 이미지 확대보기
해저드에서 볼 찾는 골퍼.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해저드


푸른 잔디로 드넓게 펼쳐진 골프장을 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울창한 수목과 호수, 다양한 화초들이 어우러진 골프장은 잘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핏보면 좋은 느낌만 갖게하는 골프장이지만 골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함정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해저드(Hazard)’이다. 해저드 앞에만 서면 골퍼들은 작아지는 느낌이다. 마치 입을 벌리고 공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1998년 22년 전 여름, 박세리의 US오픈 연장전 감동의 맨발 샷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PGA 투어에서 재연된 것이다. 해저드에 공이 빠져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했다면 그의 우승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골퍼들은 골프 코스에서 자신의 점수를 까먹을 수 있는 여러 위험에 직면한다. 두꺼운 러프, 벙커, 연못은 물론 페어웨이 한 가운데 있는 키가 큰 나무조차 모두 위협을 줄 수 있다. 보통 이런 것을 모두 합쳐 해저드라고 부른다. 해저드는 벌칙으로 설계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해저드는 보통 연못이나 개울로 되어 있거나 모래구덩이 형태이다. 해저드에서 공이 빠져나오도록 하기 위해 클럽의 헤드(머리) 부분을 먼저 땅에 닿게 해서는 안 된다.

2019년 이전 영국왕립협회와 미국골프협회에 사용된 규정집에는 해저드를 공식 용어로 사용했다. 하지만 현재는 더 이상 공식 용어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예전 공식 규정에는 ‘해저드란 벙커나 물이 있는 곳이다’라고 정의했다.

보통 워터해저드는 별도의 말뚝을 설치해 표시한다. 이 말뚝 안으로 공이 들어가면 1벌타가 원칙적으로 부여된다. 주말골퍼들은 해저드에 공이 빠지면 1벌타를 먹고 별도의 해저드 티에서 티샷을 한다. 만약 해저드 티가 없다면 공이 빠진 자리 후방에서 드롭을 한 뒤 플레이를 이어 나간다.

해저드라는 말은 원래 위험하다는 의미인 프랑스어의 똑같은 단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1천여년전 프랑스어의 한 갈래인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어를 사용하는 노르만인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면서 고대 영어인 앵글로색슨어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중세 영어로 변해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어 단어들이 골프 용어로 자리잡았다. 캐디와 해저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골프 용어로 해저드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150년 정도 됐다고 한다. 골프가 본격적인 현대스포츠로 보급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현재는 골프규정에 해저드라는 용어를 별도로 사용하지 않고는 있지만 벌칙 지역 등으로 실질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골프장의 해저드는 골퍼들에게 재미와 스릴을 맛보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다. 해저드를 잘 피하거나 넘어가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해저드는 골퍼들을 두렵게도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면 골프의 매력을 더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잠재적인 위험에 노출해 있으면서도 건강한 삶을 사는 인간들의 세상사처럼 말이다. 해저드를 결코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말아야 진정한 골퍼가 될 수 있다.

[김학수 월간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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